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교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해석>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요함을 본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을 달리하니, 

함께 일컬어 어두운 것이라고 한다. 

어둡고 또 어두우니, 수많은 묘한 것들의 문이 된다. 


<해설요약>

전체는 아니고, 도가도 비상도 이 부분에 대해서 아래에 다루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는 절대적 진리나 법칙을 의미한다. 그러한 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도라고 여기는 것, 도라고 일컫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도와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반영된 부분적 진리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상세해설>

도란 무엇인가? 도는 길이고, 법칙이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법칙이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같은 자연의 법칙이나, 

밥을 먹고 나서 시간이 오래 되면 배가 고파진다는 현상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의도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신호등이 빨간 색일 때는 멈춰야 하고 파란 불일 때는 지나가도 된다. 

자연법칙과 달리 이러한 규칙들은 위반이 가능하다. 

하지만, 위반을 하게 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거나, 처벌이나 비난을 받거나, 스스로의 양심을 괴롭히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노자에서 도는 이 중 어떤 것을 의미할까? 

먼저 자연법칙에 대입을 해 본다면,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러한 것이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도가도 비상도, 즉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일까?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중력에 의해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항상 동일한 법칙에 따르지 않는가? 


나는 이런 의문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없다. 

어쩌면, 서구인들은 항상 그러한 도를 믿고 그 도(법칙)를 밝혀내려고 악착같이 노력을 했기 때문에 선진화된 과학기술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동아시아의 문명은 지나치게 일찍 지혜를 깨달은 나머지, 실패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탐구의 길을 제대로 가 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A가 맞다, B가 맞다 라고 우기면서 논쟁을 벌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그 논쟁을 뛰어넘어, A가 맞거나 B가 맞다, 또는 A와 B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A가 B가 되기도 하고, B가 A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말들을 한다. 

그리고 이런 말들은 지혜로우며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고 집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세계의 심오한 진리에 대한 명상에 만족하는 대신, 사소한 수치들을 측정하거나, 어차피 맞거나 틀리거나 할 사소한 명제를 증명하고자 열을 올리며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멈추자. 

나는 과학사나 문명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고, 도교가 중국의 과학 발전에 미친 영향 같은 것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또한 사실 별로 관심이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문명 간의 우열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문명이든 그 나름의 특수한 역사와 환경에 의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길을 따라간 것이지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거나 열등하다는 건 의미없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300년쯤 지나면 팍스방글라데시나 팍스나이지리아의 세상일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관심있는 것은 노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였는지 이해하는 것, 

또는 내가 노자의 애매모호하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문장들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과학사 뿐 아니라 동양학에도 아마추어일 뿐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해석한 글을 읽어도 충분히 개운하지 않다면,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해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시도는 나 자신에게는 유용하다. 

하지만 그런 시도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을지는 읽는 분들이(혹시 계시다면) 직접 판단할 일이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도를 자연법칙이라고 해석할 경우 노자가 의미하는 것은 불분명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과학자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 법칙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대표적인 법칙들은 속담에서 표현되는 것들이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나랴? (어떤 소문이 돈다면 그런 소문의 빌미가 될만한 무언가 사건의 실체도 있을 것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사소한 일이라도 힘을 합치면 도움이 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한다.)

오십보 백보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정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와 같은 속담들은 어떤 법칙을 표현하기도 하고 따라야 하는 윤리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기도 하며 그런 요소들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나랴? 라고 하는 속담은 소문이 있을 경우 원인도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문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가 져야 한다는 윤리적 판단도 암시하고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 역시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탈이 난다는 일반적 법칙과 그렇기 때문에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주장을 함께 담고 있다. 


반드시 속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그러한 법칙과 가이드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와 상식일 수도 있고, 현실적 강제력을 가진 법규일 수도 있으며, 집단 내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개인의 좌우명이나 노하우일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고 눈에 보이게 표현이 되지만 어떤 것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다. 


아마도 도가도 비상도에서 도란, 이러한 법칙들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도라고 부르는 것들, 확신에 찬 어조로 인용하는 속담이나 힘주어 강변하는 윤리적 판단들, 그러한 것들은 항상 옳은 진리가 아니다. 

앞에 인용한 속담들을 생각해 보자. 

어떤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만한 가이드를 제공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방의 열을 올리는 폭력적 단언일 뿐이다. 

때로 현란한 말솜씨를 가진 논객들의 논쟁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논법이 저와 같은 속담들을 인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서, 

찬성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럴 듯한 논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반대하는 사람 입장에선 맞지 않는 말을 가져와서 거짓 근거로 삼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이 변화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면, 

상대방이 항상 그러하지 않은 것을 항상 그러하다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고 서로 생각하며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조금 더 이 여섯 글자의 문장을 생각해 보자면, 

도가도는 도라고 불리울 만한 것일 수도 있고, 도라고 흔히 불리우는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궁극의 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항상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것이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짝을 짓자면, '도라고 불리울 만한 (진짜) 도는 사람들이 고정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도가 아니다' 라고 해석하거나, 

'도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짜) 도가 아니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노자의 도는 사람들이 고정불변의 진리라고 착각하는 도와 그보다 깊은 곳에서 존재하는 진짜 도로 구분이 된다. 

깊은 곳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예를 들면 속담들은 전혀 엉뚱한 넌센스가 아니라 가끔 들어맞을 때도 있게 만드는 부분적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들을 모두 포괄하는 진짜 진리, 그것이 진짜 도가 아닐까?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진공에서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법칙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생활에서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공기 속에서 깃털은 쇠구슬보다 늦게 떨어지고, 아마도 내가 서있는 자리와 당신이 서있는 자리의 중력은 아주 미세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우리가 모든 물체는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라고 말하거나, 깃털은 쇠구슬보다 항상 늦게 떨어진다고 말한다면 충분히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엔 진공이라면, 중력이 같다면, 이런 전제들을 빠트리고 있고, 후자의 경우엔 깃털이 쇠구슬과 같은 속도로 떨어질 수 있는 경우를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정확한 문장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사에 우리가 그러한 정확성을 유지하려면 거의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근사치의 진리를 말하고 믿고 실제에 적용하여 원하는 결과와 대충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얻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얻는다. 

우리가 이러한 형편이라는 것을 살핀다면, 뭔가에 확신을 갖거나 확신을 갖고 주장하는 일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 

노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이해하고 활용하는 불완전한 진리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진짜 도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러한 도는 우리가 도라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도가도 비상도'의 의미이다. 


이제 여섯 글자 끝났다. 

굉장히 진도가 느리지만, 더 나가 보기로 하겠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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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역설이 역설인 이유는, 우주여행을 다녀온 형이 지구에 머물러 있던 동생보다 더 어리기 때문이 아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 안의 시간이 우주선 밖에서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건 상대성이론의 결론이지 역설이 아니다.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은, 상대성 때문에 발생한다. 

지구에 있는 동생 입장에서는 우주선이 움직이는 것이고, 우주선 안에 있는 형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하지만 우주선 안에 있는 형 입장에서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고, 지구 위에 있는 동생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우주선이 지구에 대해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그렇다면, 누구의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동생의 시간일까, 형의 시간일까?

형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나이를 덜 먹은 건 형 쪽일까, 동생 쪽일까? 


이 역설의 해답은 물론, 형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가속운동을 통해 우주선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가속운동은 등속운동과 달리 상대적이지 않다. 

등속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우주선의 관점에선 지구가 움직이고, 지구의 관점에선 우주선이 움직인다. 

하지만 우주선이 가속운동을 하는 동안 우주선 안에 있는 형은 우주선 앞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 일종의 중력을 느끼게 된다.

(급정거하는 기차 안에서 앞으로 몸이 쏠리는 현상)

이 현상은 지구에 있는 동생은 느끼지 않는 현상이다. 

이러한 가속운동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는 동안, 형의 입장에서 지구의 시간은 많이 흘러간 셈이다. 

지구로 귀환하는 동안 형이 보기에 지구의 시간은 우주선 안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지만,

이미 지구에선 많은 시간이 흘러간 상태이기 때문에 지구로 귀환한 형은 자기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동생을 만나게 된다. 


가속 운동을 감안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철이가 광속의 0.87배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지구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상대성 이론 공식에 따르면 이 경우 시간은 2배 정도 느리게 흐른다.) 

은하철도는 항상 등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자. 

지구 옆을 지나가면서 철이는 지구의 연도가 2016년 1월 1일인 걸 보게 된다. 

철이는 자기의 달력을 같은 날짜로 맞춘다. 

1년이 지나 은하철도 999는 지구로부터 0.87광년 떨어진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게 된다. 

이 행성은 지구와 같은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성은 지구와 동일한 등속좌표계에 있다고 가정하자. 즉, 지구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이 행성은 정지해 있다.)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 행성의 달력을 보면 2017년 1월 1일이다. 

하지만 은하철도 안에 걸려 있는 철이의 달력은 2016년 6월 30일, 겨우 6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있는 사람도 은하철도가 옆을 지나갈 때 철이의 달력이 2016년 6월 30일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구에 있는 메텔에게 알려 준다. 

메텔은 이 소식을 0.87년 후에 듣게 된다.

왜냐 하면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의 친구가 쏘아 보낸 전파가 지구에 닿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텔은 전파의 속도(=빛의 속도)도 알고 있고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까지의 거리도 알고 있으며 두 행성이 서로에게 정지해 있는 상태란 것도 알기 때문에, 

친구의 소식으로부터 상대성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즉, 철이는 지구를 지나간 후 1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갔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안의 시간은 그동안 6개월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철이 입장에서는?

은하철도 999에서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동안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과 지구의 시간은 3개월만 지나야 상대성 이론에 맞다. 

철이 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자신이며, 움직이는 것은 두 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서는 1년이 지나지 않았는가? 


여기가 중요하다. 

철이가 자기가 우주여행을 하는 동안 지구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있는 메텔의 친구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철이는 자기와 같은 등속운동계에 있는 친구에게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즉, 은하열차 운행 시간표를 보고, 지금 이 시간에 자기가 탄 은하열차와 같은 속도로 지구 옆을 지나고 있을 은하열차(이를테면 은하열차 888)에 문의를 해서 지금 지구의 달력이 어떤 날짜인지를 물어야 한다. 

왜냐 하면 어떤 좌표계에서 흐르는 시간의 길이는 어떤 좌표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서, 철이가 자신이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는 그 시점에 지구 옆을 지나는 은하철도 888의 역장이 지구의 달력을 확인하고 철이에게 전파를 발사한다고 가정하자. 

철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전파를 수신하게 되는데, 상대성이론에 의한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확인한다. 

즉, 지구의 달력은 2016년 3월 31일이었다. 

자신이 6개월 동안 은하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 지구에서는 3개월 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철이의 입장에선 은하열차의 시간으로 2016년 6월 30일에 두 열차가 동시에 각각 두 행성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행성 주민들의 입장에선 먼저 지구 옆을 2016년 3월 31일에 은하열차 888이 지나가고, 2017년 1월 1일에 철이의 은하열차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 옆을 지나갔다. 

두 사건이 한 쪽 관점에서는 동시에 일어났지만 다른 쪽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시각에 일어난 셈이다. 


행성의 주민들이 보기에, 3월 31일에 지구 옆을 지나가면서 은하열차 888의 역장이 철이에게 보낸 전파는 철이의 우주선을 따라잡는 데 한참 걸려서 철이에게 도착한다. 

왜냐 하면 철이의 은하열차는 전파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철이에게 보낸 전파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많은 거리를 지나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행성의 주민들 관점에서는 먼저 은하열차 888 역장이 철이에게 전파를 쏘고 난 한참 뒤에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 뒤에 전파가 철이의 은하열차를 따라잡아 철이에게 도착한다. 

하지만 철이 입장에서는 은하열차들은 모두 정지해 있고 행성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역장의 전파는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지나 자신에게 도착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대충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럼 쌍둥이 역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는 동시에 반대방향으로 그 행성을 지나가는 다른 은하열차(이를테면 은하열차 777)가 있다고 하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서, 그 은하열차의 역장은 행성을 스쳐가는 그 순간 지구를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 다른 은하열차(666)와 연락을 해서 그 순간의 지구의 날짜를 알아낸다. 

그 날짜는 언제일까?

2017년 9월 1일이다. 

은하열차 777은 6개월 동안 궤도를 달려 지구 옆을 지나가게 될 터인데, 그동안 지구에서는 3개월이 흐를 것이다. 

하지만 행성의 주민들이 보기에 은하열차 777은 2017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의 시간에 걸쳐 지구로 향하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쌍둥이 역설이 역설이 아닌 이유는, 좌표계가 달라지면 '동시'의 개념도,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성의 주민들 관점에서는 은하열차 888이 지구 옆을 지나가고, 한참 후에 은하열차 999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와 동시에 은하열차 777이 반대 방향으로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 옆을 지나가고, 몇 개월 후에 은하열차 666이 지구 옆을 지나가고, 그 후에 은하열차 777이 지구 옆을 지나간다. 

은하열차 승객들의 관점에서는 은하열차 888과 999가 동시에 지구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와 동시에 은하열차 666과 777이 반대방향으로 지구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은하열차 777이 지구 옆을 지나간다. 


내가 이 문제에 의문을 품은 다음 여러 자료를 찾아 봤으나 명쾌하게 해결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 은하열차 비유가 꽤 괜찮다고 생각된다. 

다른 분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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