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도, 즉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도 정확하게 말이나 생각으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존재하는 어떤 실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실재는 인간이 가진 개념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한 실재의 법칙에 따라서 하늘과 땅은 시작되었고 운행을 계속 하고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과 상대성 법칙, 원자와 쿼크의 법칙,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심오한 원리들에 의해 행성은 그 궤도를 돌고 생명체는 진화하며 인간은 태어나 사랑하고 늙고 죽어간다. 

(시작이라는 단어가 굳이 사용된 것은, 도가 변화의 원리라는 것을 강하게 함축한다.)

이러한 천지의 변화를 주재하는 원리들은 인간의 개념화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개념화하지 않으면, 즉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세상의 온갖 사물들은 서로 구분이 되지 않고 뭉뚱그려진 상태로 모호하게 존재한다. 
이름이 없다면 오늘 먹은 사과가 어제 먹은 사과와 같은 종류의 과일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눈 앞의 사물이 주는 풍요롭지만 정리되지 않은 감각의 홍수 속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우연하고 단편적인 체험들만 존재할 것이다. 
이름이 있으므로써,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사물들을 구분할 수 있고, 그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인식을 고도화시켜 갈 수 있다. 
유명만물지모는 서로 뒤섞인 수억 수조 개의 단편적 인상들로부터 만 가지 사물들을 구분해 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름을 붙이는 일(개념화)의 역할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언어를 갖지 않은 동물도 사과와 다른 종류의 과일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개념화 능력을 동물들은 갖고 있다. 
즉, 사물들에서 공통적인 속성들을 뽑아 내고, 유형을 파악하여, 다른 유형의 사물들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을 인식하고 그 개념을 활용하여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반영하는 능력은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보다 더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노자의 맥락에서는 이름이 곧 개념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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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 글에서 이 12자로 이루어진 도덕경의 첫 문장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내용이 너무 길고 산만한 듯 하여 다시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이 첫 문장은 노자의 핵심적인 전제들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서 표현되는 노자의 중요한 선언은 다음과 같다. 


1.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한다. 

2. 그 진리는 말이나 생각으로 온전하게 포착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주장은 심오하다기보다는 상식에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체화하기는 힘든 사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포착하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의 도구로서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의 인식과 추론은 결정과 행동에 근거를 제공해 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거기에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근거들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특별한 경우에만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이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하지 않아 갈등이 생기거나, 

기존 지식을 적용한 결과가 예상과 다르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차이가 나거나, 

충동이나 직관을 벗어나서 더 넓은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재조직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 등이다. 

이런 상황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드물고 예외적이었을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엔 인식과 추론의 결과를 의심 없이 빨리 실행에 옮기는 편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 다양해짐에 따라 의심과 반성의 계기도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노자와 다른 입장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주의적 입장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온전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진리와 오류,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이 구분될 수 있고 자기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고, 과학자들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며, 교조주의적 기독교인은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 


한편 상대주의적 입장에서는 여러 의견들이 서로 모순되더라도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당신 말도 맞을 수가 있고, 혹은 두 사람 말이 다 맞거나 틀릴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살든 삶은 다 마찬가지의 가치를 가진다. 


이 두 가지의 입장을 완벽하게 고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현대 사회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을 절대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든 주장이 같은 정도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원론적인 인식을 떠나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집착하기도 하고 이러나 저러나 무슨 상관인가 하면서 방기해 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그 삶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갖는 사람을 악의 축처럼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다거나, 한번 사는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노자는 상식적인 주장, 즉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명제 위에서 절대주의적 관점과 상대주의적 관점을 조화시킨다. 

우리는 편의에 따라 원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절대적 진리, 즉 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도와 어긋나는 것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하는 절대적 진리는 없을지 몰라도, 

당신의 삶에 행복이든 기쁨이든 가치든 어떤 추구하는 바가 있다면 그 추구의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상대주의적 관점에 편하게 안주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항상 우리의 인식은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갖든, 그것이 잠정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입자와 파동, 시간과 힘과 에너지에 대한 실험적 결과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직관과 어긋날 때 직관을 의심한다. 

그들은 기존에 확고해 보였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발견들을 음미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믿음을 갖지만, 그 믿음이 잠정적 가설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태도는 노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과학자의 엄밀한 방법론을 일상 생활이나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적용하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정의된 자연과학자들의 용어와 비교하자면,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언어로 생각을 하고 논쟁을 벌이며 부정확한 추론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결정한다. 

자연과학 방식의 적용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와 시간-비용 상의 한계가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영역을 벗어날 때 인식의 어려움은 훨씬 더 커진다는 것만 얘기해두자. 

우리가 직업의 영역에서 작업을 할 때보다 일상적 삶에서 하게 되는 인식들과 판단들은 해소가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떠 안을 수밖에 없다. 

도가도 비상도. 

누군가가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올바름이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식의 불완전함을 인지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편안한 상대주의로 도피할 수는 없다. 

도는 존재하며, 우리가 임의로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우리는 도를 인식하고 그에 우리 자신을 맞추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믿음이 진리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상관 없어, 중요한 건 내가 이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이 믿음에 부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이지. 

내 믿음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사실, 내 믿음이 절대적 진리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때도 많다. 

물대포를 맞으며 시위대의 앞열에 설 때, 궤변이 명백해 보이는 상대를 대상으로 논쟁을 벌일 때, 내 입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지만, 여러가지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아마 노자의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우선, 자기의 믿음을 끊임없이 재검토하는 것을 습관을 갖게 해 줄 것이고, 다른 믿음과 관점에 대한 포용력을 높여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고착되어 있을 때 한 단계 올라가서 좀더 높은 곳에서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진정시켜 줄 것이다. 

옳은 것을 주장하고, 좋은 것을 갖고 있다고 것으로 스스로 높이 올라가 있는 듯이 여기는 우리의 교만함을 어느 정도 치유해 줄 것이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강박과 조바심을 덜어 줄 것이고, 

어떤 믿음이 흔들리거나 추구하던 가치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절망하기보다 현실적인 대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슬픔이나 권태, 절망 같은 여러 감정에 물든 채로 세상을 바라 볼 때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위안이 되어 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은, 더 깊고 풍요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함의를 통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며, 

또한 그러한 풍요로움을 보도록 우리를 북돋아 줄 것이다. 


나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이런 조화, 

힘과 유연성을 함께 추구하는 태도가 노자사상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는다. 

도덕경의 상당 부분은 이런 생각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시 표현하는 데 쓰이고 있다. 


그럼 좀 더 나아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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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명 비상명은 좀 더 쉽게 풀이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은 항상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울 수 없는 것들이다, 
또는, 이름을 붙인 대상은 그 이름에 맞는 존재로 영원불변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이런 정도의 풀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름, 즉 언어의 한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지적되어 온 사항이다. 
그 한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선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철수가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명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정확하다. 
우선, 철수는 지금은 선한 사람이지만 앞으로는 악한 사람으로 바뀔 수가 있다. 
또한 아침에는 선했다가, 저녁에는 악했다가, 다음날 점심 때는 다시 선해질 수도 있다. 
출근하면서 가족과 인사할 때는 선하고 상냥하지만, 회사에서 부하직원을 대할 때는 악할 수 있다. 
그리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악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를 수 있다. 
또는 선하다는 말, 악하다는 말에는 각각 수많은 뜻이 있어서 그때 그때 다른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철수는 참 선해, 라고 말한다면, 
말한 사람은 철수가 항상 자기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앞세운다는 뜻으로 이야기했지만 듣는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다는 뜻으로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중에 철수를 만났을 때 그가 독불장군식으로 부하직원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놀랄 지 모른다. 

또한 이름은 이름을 붙인 대상의 모든 면을 나타내지 못한다. 
이름이란, 개개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들 중에서 다른 사물들과 갖고 있는 공통된 속성을 뽑아 내어 동일하게 취급하기 위한 도구이다. 
우리는 사과가 아닌 것과 사과인 것을 구분할 수 있으면 사과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이해가 있으면 예를 들어 사과 다섯 개만 안방으로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사과라는 이름은 같은 이름을 가지는 사물들 간의 세부적인 차이를 구분해내지 못한다. 
사과라는 말을 들으면 붉은 색의 둥그스름하고 꼭지가 달려 있는 과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의 사과 하나하나는 그 색이나 모양이나 맛이 모두 다 다르다. 
사과라는 이름은 이런 다양함을 다 담지 못하고 묶어서 부르는 데 쓰일 뿐이다. 

또한 언어는 직접적인 체험과 같지 못하다. 
우리가 고통이나 불행, 기쁨, 사랑,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런 체험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단어들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그 대상을 이해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이 누구지? 그 사람은 철수야.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명문대 출신이야. 그 사람은 부자야. 그 사람은 엔지니어야. 
이름을 붙이는 것, 언어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은 대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언어는 대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포착하지 못하고 대상이 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고,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일부만을 표현할 수 있고, 
직접적인 체험을 불완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과 이름이 붙여진 대상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존재하고, 
이름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항상 불완전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언어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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