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씨의 '빅퀘스천'이란 책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고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었다. 검색을 해 보니 관련된 글(인생 시나리오 6가지라면, 당신의 최종 선택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는 여섯 가지 방식 중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리디아의 부유한 왕 크로이소스가 주인공이다. 크로이소스 왕이 자신을 방문한 그리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자 솔론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난 그리스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끝을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크로이소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뿐이지만 나중에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패해 사로잡히고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솔론의 말이 생각난 크로이소스는 그의 이름을 한탄스럽게 외친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키루스 왕이 크로이소스에게 연유를 묻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이 했던 말을 전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키루스 왕은 크로이소스를 풀어주고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마지막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든 끝이 좋으면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고 습관으로는 인생도 한 편의 영화처럼 끝이 좋아야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령화 시대의 현실에서 우리 삶의 가치가 그 마지막 모습으로 평가받는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전쟁과 기아와 여러 위험이 줄어든 현대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노인이 되고 병을 앓다가 죽는다. 죽는 자리에 위로가 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죽은 뒤에 좋은 기억을 간직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재산을 남겨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치매를 앓으며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될지 병실 침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면서 몇년을 지내게 될지 하룻밤 사이에 평안한 죽음을 맞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리스크이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쪽이다. 
절대적인 인생의 의미란 것은 없겠지만, 의미라는 것이 삶을 살면서 지향하는 방향을 정하는 데 활용되는 가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 마지막을 어떻게 맞느냐보다는 그 전까지 내가 할 경험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선균 씨의 죽음은 이르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분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75년생이시니 50년에 조금 못 미치는데,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이선균 씨의 삶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밀도 있게 채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주로 연기를 통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본 작품들은 나의 아저씨, 기생충, 하얀거탑, 골든타임, 검사내전의 일부, 우리선희, 화차, 내 아내의 모든 것, 임금님의 사건수첩 정도이다. 
연기로 보여 준 모습이 본인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그의 연기들에서 느껴졌던 인간성의 결들이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들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 결들이란 무엇이었을까?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 주었던 착함과 성실함과 반듯함과 믿음직스러움이 중심적인 이미지인 것 같다. 하얀거탑의 최도영 의사가 보여 준 강직함이나 화차에서 보여 준 따뜻함, 기생충의 박사장이 보여 준 유능함의 카리스마는 이 중심 이미지들과 겹친다. 한편으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검사내전에 보여준 찌질함과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볼 수 있었던 경쾌함, 우리선희에서 느껴졌던 풋풋함과 고지식함 등 좀 결이 다른 이미지들도 있다.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휴머니즘이다. 그를 떠올리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선량하지만 찌질하기도 한, 부드럽지만 강한, 인간다움이 느껴지고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던 연기자였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이나 이미지들이 실제의 본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연기라고 하는 것은 배우가 연기하려는 인물의 마음을 자신 속에서 재현해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연기되는 인물들은 그 배우가 가진 마음의 가능성의 공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고, 배우라는 존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연기했던 장면들을 기억하면서 그를 추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 가지 장면들을 뽑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 나의 아저씨, 오랜 만에 만난 지안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방백으로 편안함에 이르렀는지 묻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건너 걸어가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망치를 들고 벽을 두드리며 형과 동생을 모욕한 건축업자를 협박하는 장면
  • - 우리선희, 선배와 술을 마시며 '형 내말들어 내말들어 형 내말들어.. 끝까지 파고 끝까지 파야 아는거고 끝까지 파야.."​ 대사를 하는 장면
  • - 검사내전, 카페에서 멤버쉽 쿠폰으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시켜 마시는 에필로그
  • - 골든타임, 사고 치고 자책하고 야단 맞고 성장하는 인턴 의사의 모습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이 있지만 내가 장면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구체적인 장면이랑 매칭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경찰 조사를 받기 전후에 기자들 앞에서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하거나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고 이야기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던 모습에서는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로선 남아 있는 길 중 최선이라고 생각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영화와 광고 등의 위약금으로 100억원 정도를 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기사도 보았는데, 연예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책임을 요구 받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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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역설이 역설인 이유는, 우주여행을 다녀온 형이 지구에 머물러 있던 동생보다 더 어리기 때문이 아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 안의 시간이 우주선 밖에서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건 상대성이론의 결론이지 역설이 아니다.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은, 상대성 때문에 발생한다. 

지구에 있는 동생 입장에서는 우주선이 움직이는 것이고, 우주선 안에 있는 형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하지만 우주선 안에 있는 형 입장에서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고, 지구 위에 있는 동생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우주선이 지구에 대해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그렇다면, 누구의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동생의 시간일까, 형의 시간일까?

형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나이를 덜 먹은 건 형 쪽일까, 동생 쪽일까? 


이 역설의 해답은 물론, 형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가속운동을 통해 우주선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가속운동은 등속운동과 달리 상대적이지 않다. 

등속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우주선의 관점에선 지구가 움직이고, 지구의 관점에선 우주선이 움직인다. 

하지만 우주선이 가속운동을 하는 동안 우주선 안에 있는 형은 우주선 앞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 일종의 중력을 느끼게 된다.

(급정거하는 기차 안에서 앞으로 몸이 쏠리는 현상)

이 현상은 지구에 있는 동생은 느끼지 않는 현상이다. 

이러한 가속운동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는 동안, 형의 입장에서 지구의 시간은 많이 흘러간 셈이다. 

지구로 귀환하는 동안 형이 보기에 지구의 시간은 우주선 안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지만,

이미 지구에선 많은 시간이 흘러간 상태이기 때문에 지구로 귀환한 형은 자기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동생을 만나게 된다. 


가속 운동을 감안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철이가 광속의 0.87배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지구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상대성 이론 공식에 따르면 이 경우 시간은 2배 정도 느리게 흐른다.) 

은하철도는 항상 등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자. 

지구 옆을 지나가면서 철이는 지구의 연도가 2016년 1월 1일인 걸 보게 된다. 

철이는 자기의 달력을 같은 날짜로 맞춘다. 

1년이 지나 은하철도 999는 지구로부터 0.87광년 떨어진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게 된다. 

이 행성은 지구와 같은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성은 지구와 동일한 등속좌표계에 있다고 가정하자. 즉, 지구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이 행성은 정지해 있다.)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 행성의 달력을 보면 2017년 1월 1일이다. 

하지만 은하철도 안에 걸려 있는 철이의 달력은 2016년 6월 30일, 겨우 6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있는 사람도 은하철도가 옆을 지나갈 때 철이의 달력이 2016년 6월 30일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구에 있는 메텔에게 알려 준다. 

메텔은 이 소식을 0.87년 후에 듣게 된다.

왜냐 하면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의 친구가 쏘아 보낸 전파가 지구에 닿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텔은 전파의 속도(=빛의 속도)도 알고 있고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까지의 거리도 알고 있으며 두 행성이 서로에게 정지해 있는 상태란 것도 알기 때문에, 

친구의 소식으로부터 상대성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즉, 철이는 지구를 지나간 후 1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갔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안의 시간은 그동안 6개월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철이 입장에서는?

은하철도 999에서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동안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과 지구의 시간은 3개월만 지나야 상대성 이론에 맞다. 

철이 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자신이며, 움직이는 것은 두 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서는 1년이 지나지 않았는가? 


여기가 중요하다. 

철이가 자기가 우주여행을 하는 동안 지구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있는 메텔의 친구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철이는 자기와 같은 등속운동계에 있는 친구에게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즉, 은하열차 운행 시간표를 보고, 지금 이 시간에 자기가 탄 은하열차와 같은 속도로 지구 옆을 지나고 있을 은하열차(이를테면 은하열차 888)에 문의를 해서 지금 지구의 달력이 어떤 날짜인지를 물어야 한다. 

왜냐 하면 어떤 좌표계에서 흐르는 시간의 길이는 어떤 좌표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서, 철이가 자신이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는 그 시점에 지구 옆을 지나는 은하철도 888의 역장이 지구의 달력을 확인하고 철이에게 전파를 발사한다고 가정하자. 

철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전파를 수신하게 되는데, 상대성이론에 의한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확인한다. 

즉, 지구의 달력은 2016년 3월 31일이었다. 

자신이 6개월 동안 은하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 지구에서는 3개월 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철이의 입장에선 은하열차의 시간으로 2016년 6월 30일에 두 열차가 동시에 각각 두 행성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행성 주민들의 입장에선 먼저 지구 옆을 2016년 3월 31일에 은하열차 888이 지나가고, 2017년 1월 1일에 철이의 은하열차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 옆을 지나갔다. 

두 사건이 한 쪽 관점에서는 동시에 일어났지만 다른 쪽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시각에 일어난 셈이다. 


행성의 주민들이 보기에, 3월 31일에 지구 옆을 지나가면서 은하열차 888의 역장이 철이에게 보낸 전파는 철이의 우주선을 따라잡는 데 한참 걸려서 철이에게 도착한다. 

왜냐 하면 철이의 은하열차는 전파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철이에게 보낸 전파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많은 거리를 지나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행성의 주민들 관점에서는 먼저 은하열차 888 역장이 철이에게 전파를 쏘고 난 한참 뒤에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 뒤에 전파가 철이의 은하열차를 따라잡아 철이에게 도착한다. 

하지만 철이 입장에서는 은하열차들은 모두 정지해 있고 행성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역장의 전파는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지나 자신에게 도착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대충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럼 쌍둥이 역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철이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는 동시에 반대방향으로 그 행성을 지나가는 다른 은하열차(이를테면 은하열차 777)가 있다고 하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서, 그 은하열차의 역장은 행성을 스쳐가는 그 순간 지구를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 다른 은하열차(666)와 연락을 해서 그 순간의 지구의 날짜를 알아낸다. 

그 날짜는 언제일까?

2017년 9월 1일이다. 

은하열차 777은 6개월 동안 궤도를 달려 지구 옆을 지나가게 될 터인데, 그동안 지구에서는 3개월이 흐를 것이다. 

하지만 행성의 주민들이 보기에 은하열차 777은 2017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의 시간에 걸쳐 지구로 향하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쌍둥이 역설이 역설이 아닌 이유는, 좌표계가 달라지면 '동시'의 개념도,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성의 주민들 관점에서는 은하열차 888이 지구 옆을 지나가고, 한참 후에 은하열차 999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와 동시에 은하열차 777이 반대 방향으로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 옆을 지나가고, 몇 개월 후에 은하열차 666이 지구 옆을 지나가고, 그 후에 은하열차 777이 지구 옆을 지나간다. 

은하열차 승객들의 관점에서는 은하열차 888과 999가 동시에 지구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그와 동시에 은하열차 666과 777이 반대방향으로 지구와 켄타우르스 알파 행성을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은하열차 777이 지구 옆을 지나간다. 


내가 이 문제에 의문을 품은 다음 여러 자료를 찾아 봤으나 명쾌하게 해결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 은하열차 비유가 꽤 괜찮다고 생각된다. 

다른 분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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