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을 달리 하니, 함께 일컫자면 검은 것이다. 
검고 검으니, 수많은 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이다. 

두 가지라고 하면, 도=무명=천지지시=무욕=관기묘와 명=유명=만물지모=무욕=관기요 일 것이다. 
인간의 개념화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진리인 도와 이를 인간이 개념화하여 이해한 명, 이 두가지이다. 
노자는 이 두 가지가 같은 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와 명과 별개로 이 두 가지의 근본이 되는 어떤 것이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 근본적인 것이 굳이 도와 구분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철수라고 부르는 사람의 실재와, 철수라고 하는 이름, 그것은 동일하게 철수라고 하는 실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세밀하게 따져 보자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명이라는 것은 도에 전적으로 의존적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유니콘이라고 하는 생물은 이름은 존재하지만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개념 중에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가리키는 명사도 있고, 실재하지 않는 관계로 개념들을 이어 붙인 문장들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 명이 같은 곳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생각해 보자면 이런 의문도 생긴다. 
유니콘이라고 하는 생물은 정말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유니콘을 주인공으로 하는 어떤그 소설이 쓰여져서 베스트셀로로 팔리고 그에 대한 영화도 만들어져 전세계 사람들이 알 정도가 된다면, 
그렇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존재를 실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유니콘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사랑, 희망, 국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또는 인간이 지닌 개념의 맥락에서 떼어 놓고 보면 의미가 없는 것들도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실재나 존재의 개념도 그렇게 쉽지 않게 느껴진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철학자들은 수백년 간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논의에 관여할 능력도 없고 그럴 만한 의지나 관심도 없다. 

다만 스스로 납득이 되도록 정리를 해 보자면, 
개념 역시 실재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독립된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세계가 있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그 세계는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개념화된다. 
하지만 그 개념들은 단순히 물리적 실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 간에, 그리고 물리적 실재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변화해 나간다. 
인간은 세상을 개념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개념들을 발전시키며, 개념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니 실재에는 물리적 세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말, 감정, 무의식, 의지와 동기, 합의된 개념 등이 다 포함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라는 말은 이런 실재를 모두 뜻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도가 물리적 법칙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도는, 사람이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기 이전에 사물이 돌아가는 원리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가 개념과 무관하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떤 패턴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면서 실재와 인식 사이에 간격이 생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본질 자체가 개념적인 인식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화에 영향을 받기 전의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마 명확한 경계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 이 감정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욕구가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에 의해 비롯된 것인지, 문화와 경험을 통해 학습된 것인지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노자는 어느 정도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도덕경의 뒷부분에는 자연과 인위를 대조시키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많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보도록 하자. 
1장에서는 아직 자연과 인위의 구분이나 그에 대한 평가보다는, 도와 명의 정의에 중점이 주어져 있다. 

논리적으로 노자의 위 문장을 해석해 보면 도와 명 이전에 그 두 가지가 모두 함께 비롯되는, 근원적인 무엇이 있다. 
그것을 현(검은 색)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명은 도의 영역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실재들(유니콘과 같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현이란 명과 도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의 실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현이란, 우리의 개념적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와 우리의 개념적 인식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상적 실재들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 실재이다. 
이 현이라고 하는 것에선,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단단한 물체도 나오고, 사과라는 이름도 나오고, 빨갛고 달고 시고 둥그런 감각적 인식과 개념적 인식들도 비롯된다. 
우리의 제한된 인식으로는 이 현을 밝게 포착할 수 없고, 현은 그 안에 무한한 것이 숨겨져 있는 어둡고 깊은 어떤 것이다. 

이런 해석은 철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우격다짐으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정도로 이해하고 도덕경을 더 읽어가 보려고 한다. 

*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1장에서 표현된 노자의 도식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닮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현은 스피노자의 도식에선 신=세상이고, 도는 물질, 명은 정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도와 명의 구분은 스피노자의 물질과 정신의 구분과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사고의 방식이나 함의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노자와 스피노자를 비교하는 일은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되나, 일단은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아마 누군가 이미 그런 비교를 해 봤을 것이니, 기회가 되면 그런 내용들도 찾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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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가장 핫 했던 시절은 1987년이지 않을까 싶다. 그때는 권력의 부정의가 명확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한 뜻으로 모였고 정치란 진지한 이슈였다.
그 후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삼십년 가까이 흐르면서, 이제 정치는 우리나라의 3류들이 모여 세력 다툼이나 벌이는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마음대로 폄하해도 괜찮은 거의 유일한 직업이 국회의원이지 않았을까 싶다.
필리버스터는 특이한 이벤트다. 국민이 언론의 편집을 거치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었고, 이렇게 응원한 적도 없었다. 적어도 87년 이후에는 노무현, 유시민 등 특정 정치인 몇 명 외에는 거의 없었다.
인터넷으로든 케이블 티비로든 국회방송을 직접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기껏해야 전국민의 1%가 1시간 정도라도 보았을까? 거기다가 사실 나만 해도 수십분 이상 집중해서 보기는 힘든, 재미없는 이야기가 태반이다.
하지만 언론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다가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직접 지켜 본 소수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정치인에 대해 가져왔던 일반 국민들의 반응과 매우 다르다. 경청하고 지지를 표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알았던 것이 부족했다는 식의 의견들인데, 그동안 냉소와 비판은 넘쳐났어도 정치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일반 국민의 반응으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나만 해도 정치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표 당시 문의원이 억지로 밀려나게라도 된다면 민주당을 지지할 필요는 없어진다, 라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야당은 특정 개인과 그 개인의 지지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부류의 믿음과 태도,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개성으로 구현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정당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들이 언론의 벽을 넘어 아주 일부이더라도 국민에게 직접 가 닿았다. 이것이 숫자 계산을 넘어서 중요한 변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율로는 적더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의 인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들 스스로도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때로 좋은 틀 안에서 집중하여 노력하면, 높은 공덕으로 쌓이게 된다.
참고로 나는 20대부터 24대 국회까지 불출마를 선언한다. 앞으로 16년 동안은 내공이 부족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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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고로, 항상 욕심이 없음으로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을 갖고서 그 요함을 본다. 

여기에서 어려운 한자는 요 자이다. 어디서는 교 자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요 라는 한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 어느 뜻이 이 맥락에 맞는지 알기 어렵다. 
순찰하다, 구하다(바라다), 가장자리, 변방, 샛길, 훔치다 이런 뜻들이 있다. 
아마 무단침입이 일어나기 쉬운 곳을 순찰한다는 의미에서, 가장자리, 변방, 샛길, 구하다, 훔치다 이런 여러 뜻이 파생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묘하다는 단어와 댓구를 생각해 볼 때, 요라는 것은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혹은 순찰을 하는 사람이 맡은 구역을 다니면서 살피듯이 무엇인가를 보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하면,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볼 때는 그 묘함을 본다, 
욕심을 갖고 무엇인가를 볼 때는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 서로 경계를 이루는 (구별되는) 지점을 본다, 
이런 정도의 해석이면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충 노자의 취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묘함을 본다는 것은, 말로 묘사하기 힘든 세밀한 부분들을 본다는 뜻일 것이다. 
요함을 본다는 것은 해석에 따라 뉘앙스는 달라지겠지만, 순찰하는 사람이 뭔가 이상한 점들을 찾아내듯이 관심 있는 부분을 보게 된다, 
또는 사물들의 가장자리, 즉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분별되는 지점들을 위주로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비유를 계속 사용해 보자면, 
사과를 볼 때는 눈 앞에 있는 대상을 사과라는 이름과 무관하게 볼 수도 있고, 사과라는 개념 틀 안에서 볼 수도 있다. 
전자는 보고 있는 사과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또는 남들이 보지 못한 어떤 자기만의 독특한 인상을 찾아 내고자 하는 화가의 자세라고 하겠고, 
후자는 일상적인 태도, 예를 들어 냉장고에서 먹기 위해 사과를 꺼낸다거나 할 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비유를 사용하자면, 사랑에 빠진 연인이 서로를 바라볼 때는 상대방의 묘함을 본다. 
하지만 클럽에서 만난 상대를 어떻게든 모텔로 데려가고자 하는 남자가 상대를 바라볼 때는 자신의 욕구에 도움이 되는 신호들만 파악한다. 
한편, 장군이 전투를 위해 부하들을 배치할 때는 각 병사들의 인간적인 개성들은 무시되고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만 개념으로 묶여 이용된다. 
즉, 전투 경험이 많고 사기가 높은 1중대 100명은 전방에 배치, 최근에 힘든 전투를 겪은 2중대 80명은 후방에 배치, 이런 식이다. 

이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화가가 사과를 그리면서 그 사과라는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어떤 목적에 대상을 이용하면서도 그 목적의 달성에 관계가 없는 대상의 특질들을 전혀 인식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욕구에 중점을 두고 그에 필요한 도구로서 대상을 보는 태도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에 중점을 두는 태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의 틀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그런 개념이 잡아내지 못하는 대상의 미묘한 특징들을 인식하는 것 사이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진화론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앞서도 말했지만 개념화의 능력은 우리의 유전자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화해 온 결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가 진화론을 알지는 못했겠지만, 개념화의 능력이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목적이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사물을 조작하기에 편하도록 개념화한다. 
개념화를 통해 무수한 사물을 분류하고 개념 간의 관계를 파악하며 그로부터 미래를 예측하고 필요한 행동을 결정한다. 
무수한 사물의 특질 중에서 욕구 달성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지워 이름으로 묶음으로써, 인식과 결정의 과정을 경제적으로 수행한다. 

정리하자면, 유욕과 무욕은 대상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의 태도이다. 
우리는 유욕으로서 개념으로만 인식하기 어려운 사물들의 묘함을 볼 수 있고, 
유욕으로서 사물들이 서로 구분되는 지점들에 주목하여, 경제적으로 정교한 인식을 이루어낸다. 

유욕과 무욕 중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바빠지고 합리성이 강요되는 현대 사회에서, 무욕의 태도를 가질 기회란 더 드물어지는 듯 하다. 
우리는 거의 항상 목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여가시간 마저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낀다. 
하지만 정상을 정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산을 오르다 문득 주변의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인데 이런 말을 해 줘서 이렇게 기분을 좋게 해 주어야겠다 는 식의 작업에만 몰두하다가 문득 지금까지 봐 오지 못했던 상대방의 깊이를 느끼는 때가 있는 것처럼, 
무욕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문득 상기시켜 주곤 한다. 

*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은 대상을 볼 때 주로 시스템적인 측면, 즉 내부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떻게 조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를 파악하는 데 집중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성향이 적은 대신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유욕과 무욕의 방식은 테스토스테론의 많고 적음과 어느 정도 대응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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