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청미래 | 2011-09-2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알랭 드 보통, “지혜와 희망의 철학”을 말하다알랭 드 보통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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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종교에 대한 책도 한 권 썼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 강연을 TED에서 볼 수 있다. 

TED 동영상에서 botton으로 찾아 보면 나올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강연은 그의 책이 그런 것처럼 유쾌하고 쉽고 설득력이 있다. 

그는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종교가 주는 교훈들을 존중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종교의 교훈들은 착하게 살아라, 이웃을 사랑하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이런 종류와는 좀 다르다. 
그런 윤리들은 사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철학과 공동체적인 상식과 개인의 양심으로도 발견되고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종교가 오히려 그런 개개의 윤리적 가치들보다 가치를 다루는 보편적인 방식에 있어서 비종교적인 방식과 차이가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세속적인 관점은 어떤 메시지를 평가할 때 그 메시지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갖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렇지만 종교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들은 신이 사자나 성인들에 의해 이미 말해졌고,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들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자신의 몸과 삶에 배이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주요한 메시지들, 고통은 집착에서 생겨나고 자아 역시 일종의 환상이자 집착이며 그러한 집착을 버리는 데서 자유와 기쁨이 얻어진다고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머리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그것을 진리로서 확신하고 끊임없이 상기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 
불교의 철학에 대한 학자의 현란한 논리보다, 하나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108배를 올리고 염주를 세는 어느 할머니의 신실함이 더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자들도 성경의 동일한 문구를 반복해서 읽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깨달았던 진리를 다시 상기하며 반성하고 결심한다. 

종교는 이런 관점에서, 종교적 진리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형식적인 의례를 중요시하고, 신자들의 교만을 경계하며, 머리에 의한 이해가 아닌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끊임없는 반성과 실천을 요구한다. 
종교는 새로운 지식을 아는 것보다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더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무신론자의 관점에서, 종교가 천명하는 진리의 논리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무신론자는 종교가 갖고 있는 진지함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들은 어떤 진리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항상 의심과 불안과 허무가 존재한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사랑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지속되지 못한다. 
무신론자가 추구하는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처지가 바뀜에 따라 상대적으로 중요해지기도 하고 중요해지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신론자가 자기 뜻대로 종교를 선택하여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신론자에게도 나름의 믿음이 있어서, 어떤 유익이 있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는 진리에 자신을 의탁할 수는 없다. 
그는 종교에 속지 않더라도, 속지 않고 살 도리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지킬 믿음들을 선택하고, 그 믿음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음을 자랑스러워 하며, 하지만 확신을 갖는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편견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편견이라고 인식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골라내면서, 계시를 기다린다.

나는 알랭 드 보통에게 동의한다. 
무신론자에게도 종교의 교훈들은 도움이 된다. 
절대적이고 불변하진 않더라도, 지금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고 그것들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가진 믿음과 좀 더 일관성을 갖는 삶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모든 것은 어떻게 되든 마찬가지라는 목소리를 극복해야 한다.
아마도 그러한 가치와 믿음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상기하고 일상의 삶에서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을 그냥 살아지는대로 살거나 별 검토 없이 받아들인 가치관에 종속되어 사는 것보다 자신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가치관과 믿음에 일관성을 갖도록 사는 것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줄이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의지하기 쉬운 가치이다. 
그리고, 노력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진리를 강요할 수는 없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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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가 설치된 노트북에게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윈도우의 작업탐색기를 켜면, CPU나 메모리의 계속 변화하는 점유율을 볼 수 있다. 
이 작업탐색기에 점유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나 피곤해" 하고 메시지 창을 띄우게 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이 노트북이 피곤함을 느낄 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트북이 스스로의 상태를 체크하고 그에 따라 더 이상 키보드나 마우스 입력을 받지 않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면? 
어쩌면 노트북도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사람의 마음과 차이점은 모래 한 알과 지구 전체의 차이보다 더 크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수준이라도 일종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자기조절능력이 고도화된 전자두뇌를 갖게 된 로봇이 눈 앞에 나타나서, 
"제가 오늘은 기분이 좀 별로네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제 두뇌회로가 팽팽 돌아가는데요." 
이런 말들을 스피커로 내보낸다면, 
내가 그래서, 너는 기분이란 걸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아니에요, 전 분명히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하고 대답한다면, 
나는 그 로봇이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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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심하게 아팠다. 몸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도 바닥까지 내려 앉았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은, 지금 이런 것은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며, 몸이 나아지면 사태가 좀 나아질 거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더 나이를 먹을수록 몸 상태가 만성적으로 좋지 않을텐데, 그때는 어떠할까? 

그건 그때의 문제이고, 아무튼 나는 한숨을 돌려가는 상태이다. 

신이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닐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란 개념 자체가 모순인 것 같다. 

즉,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한 존재라는 것도 말의 오용이다.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은 뻔한 의문이지만, 

그보다는 덜 뻔하지만 역시 신선함이 덜해져 가는 의문은,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는 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질병도 가난도 실업도 불경기도 전쟁도 없어지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도 없이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천생연분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수백년 씩 살다가, 이제 충분히 살만큼 살았다, 싶을 때 스탠드의 불을 끄고 잠이 들듯이, 죽게 된다면. 그런 세상은 정말 훌륭한 세상이긴 하지만, 그런 세상이라고 해서 어떤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다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대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고 해서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난 궁극적인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난 왜 당장 존재를 그치지 않는가? 

그건 나는 궁극의 의미와 삶을 계속 진행해 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동법칙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는 행성도 없고, 자살하는 동물도 (아마도) 없다. 

궁극의 의미 같은 문제에 대한 생각으로 삶이 영향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과 본분을 과대 평가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본분이니 하는 말도 모순이 아니냐, 어떤 일이든 가능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여러 가지 대답들을 자랑스러운 어조로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 아니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으며, 그 경향들을 의미라고 하는 개념의 매개로 묶어 추구하는 것 역시 그런 경향 중의 하나이다. 만약, 철학을 연구하다가 허무주의에 빠져 도박에 중독되었다가 노숙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여러 경향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결과이지만, 아마 그런 결과는 의지나 생각의 간섭으로 약간의 조정을 가해 피할 수도 있는 결과였을 것이고 그것을 운명이라거나 철학적 귀결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적 견지에서 당신의 삶이 어느 누구의 삶보다 못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구의 삶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도 없을 것이고, 어쨌든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주어진 사고력이 이상하게 (잘못되게 라고는 할 수 없어도) 펼쳐져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뭐랄까,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수수께끼 같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미란 없다. 그렇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이건 정도의 문제인 것일까?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지만, 철학자처럼 궁극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사회가 정해 주는 의미 체계, 흔한 말로 돈과 명예와 가족과 사랑 등의 가치 기준을 따라 가거나,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전통, 또는 행복한 삶의 전범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미보다는 방법에 대부분의 고민을 할애한다. 부와 명예가 좋은 것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다만 부와 명예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삶의 모습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 또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행복의 명백한 조건들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아마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지적인 철학자들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으며, 내가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내 삶의 행복과 선택의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픈 도중에, 행복에 대해 갖고 있던 여러 믿음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여러 가지,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여러 가지가 몸이 아픈 동안에는 다 변변하지 않거나 혐오감을 일으켰다. 

이것이 종교가 없는 사람의 약점이다. 의미를 잠정적인 도구 정도로 여기다가는, 주관적인 감정이 평소의 믿음과 어긋나는 쪽으로 움직일 때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상황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 뿐이었다. 

몸은 이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나, 믿음직스럽지는 않다. 

건강한 몸, 친구, 일.

라만차의 기사 노래 가사처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나가기 위해서는 붙잡을 것들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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