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고로, 항상 욕심이 없음으로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을 갖고서 그 요함을 본다. 

여기에서 어려운 한자는 요 자이다. 어디서는 교 자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요 라는 한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 어느 뜻이 이 맥락에 맞는지 알기 어렵다. 
순찰하다, 구하다(바라다), 가장자리, 변방, 샛길, 훔치다 이런 뜻들이 있다. 
아마 무단침입이 일어나기 쉬운 곳을 순찰한다는 의미에서, 가장자리, 변방, 샛길, 구하다, 훔치다 이런 여러 뜻이 파생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묘하다는 단어와 댓구를 생각해 볼 때, 요라는 것은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혹은 순찰을 하는 사람이 맡은 구역을 다니면서 살피듯이 무엇인가를 보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하면,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볼 때는 그 묘함을 본다, 
욕심을 갖고 무엇인가를 볼 때는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 서로 경계를 이루는 (구별되는) 지점을 본다, 
이런 정도의 해석이면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충 노자의 취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묘함을 본다는 것은, 말로 묘사하기 힘든 세밀한 부분들을 본다는 뜻일 것이다. 
요함을 본다는 것은 해석에 따라 뉘앙스는 달라지겠지만, 순찰하는 사람이 뭔가 이상한 점들을 찾아내듯이 관심 있는 부분을 보게 된다, 
또는 사물들의 가장자리, 즉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분별되는 지점들을 위주로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비유를 계속 사용해 보자면, 
사과를 볼 때는 눈 앞에 있는 대상을 사과라는 이름과 무관하게 볼 수도 있고, 사과라는 개념 틀 안에서 볼 수도 있다. 
전자는 보고 있는 사과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또는 남들이 보지 못한 어떤 자기만의 독특한 인상을 찾아 내고자 하는 화가의 자세라고 하겠고, 
후자는 일상적인 태도, 예를 들어 냉장고에서 먹기 위해 사과를 꺼낸다거나 할 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비유를 사용하자면, 사랑에 빠진 연인이 서로를 바라볼 때는 상대방의 묘함을 본다. 
하지만 클럽에서 만난 상대를 어떻게든 모텔로 데려가고자 하는 남자가 상대를 바라볼 때는 자신의 욕구에 도움이 되는 신호들만 파악한다. 
한편, 장군이 전투를 위해 부하들을 배치할 때는 각 병사들의 인간적인 개성들은 무시되고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만 개념으로 묶여 이용된다. 
즉, 전투 경험이 많고 사기가 높은 1중대 100명은 전방에 배치, 최근에 힘든 전투를 겪은 2중대 80명은 후방에 배치, 이런 식이다. 

이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화가가 사과를 그리면서 그 사과라는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어떤 목적에 대상을 이용하면서도 그 목적의 달성에 관계가 없는 대상의 특질들을 전혀 인식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욕구에 중점을 두고 그에 필요한 도구로서 대상을 보는 태도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에 중점을 두는 태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의 틀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그런 개념이 잡아내지 못하는 대상의 미묘한 특징들을 인식하는 것 사이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진화론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앞서도 말했지만 개념화의 능력은 우리의 유전자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화해 온 결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가 진화론을 알지는 못했겠지만, 개념화의 능력이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목적이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사물을 조작하기에 편하도록 개념화한다. 
개념화를 통해 무수한 사물을 분류하고 개념 간의 관계를 파악하며 그로부터 미래를 예측하고 필요한 행동을 결정한다. 
무수한 사물의 특질 중에서 욕구 달성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지워 이름으로 묶음으로써, 인식과 결정의 과정을 경제적으로 수행한다. 

정리하자면, 유욕과 무욕은 대상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의 태도이다. 
우리는 유욕으로서 개념으로만 인식하기 어려운 사물들의 묘함을 볼 수 있고, 
유욕으로서 사물들이 서로 구분되는 지점들에 주목하여, 경제적으로 정교한 인식을 이루어낸다. 

유욕과 무욕 중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바빠지고 합리성이 강요되는 현대 사회에서, 무욕의 태도를 가질 기회란 더 드물어지는 듯 하다. 
우리는 거의 항상 목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여가시간 마저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낀다. 
하지만 정상을 정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산을 오르다 문득 주변의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인데 이런 말을 해 줘서 이렇게 기분을 좋게 해 주어야겠다 는 식의 작업에만 몰두하다가 문득 지금까지 봐 오지 못했던 상대방의 깊이를 느끼는 때가 있는 것처럼, 
무욕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문득 상기시켜 주곤 한다. 

*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은 대상을 볼 때 주로 시스템적인 측면, 즉 내부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떻게 조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를 파악하는 데 집중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성향이 적은 대신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유욕과 무욕의 방식은 테스토스테론의 많고 적음과 어느 정도 대응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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