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불평등>은 2022년 출간된 책으로, 문재인 전대통령이 추천하는 등 화제에 많이 올랐던 책이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은 우선 그 역설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끈다. 우리는 보통 불평등이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은 불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랜 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민주당 소속의 정책전문가인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난다면, 이 독후감을 읽기 전에 책을 먼저 직접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설책을 읽듯,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데이터와 논리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답변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독후감은 일종의 스포일러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좋은 불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늘어남으로서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불평등이다. 저자는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 좋은 평등과 나쁜 평등의 네 가지 차원을 구분하는데, 나쁜 불평등은 저소득계층의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우, 좋은 평등은 그 반대의 경우, 나쁜 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불평등이 완화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역사를 주요한 변곡점으로 경계가 지어지는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하는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지는 불평등의 지속적 심화는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급성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1992년의 한중수교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주요 이벤트로 삼는 중국 경제와 무역의 급격한 성장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중국수출 역시 급증하면서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통해 대기업 임직원들의 보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 불평등 확대의 주 요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의 신발산업과 대구의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저기술 산업은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사양화되고 관련 종사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줄어들면서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2007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기업의 성과를 줄이면서 불평등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와 미중 갈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불평등의 확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전자가 좋은 불평등의 사례라면 후자는 나쁜 평등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저자는 여러 가지 데이터로 뒷받침하는데, 나한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88년에서 2008년 기간 동안 글로벌 소득 분위별 실질소득 상승률을 표현한 그래프였다. 오른쪽 방향으로 서 있는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코끼리 곡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전세계적으로 코끼리 등에 해당하는 하위 10~60% 계층은 소득상승 비율이 높은 반면, 코끼리의 굽어진 코 아랫면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20% 부근 계층은 실질소득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전자는 주로 중국으로 대표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의 국민들이고, 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중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권자들이 이민을 거부하고 자국의 기존 엘리트계층을 불신하면서 이에 편승하는 극우 정파를 지지하는 현상을 일부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해법이 잘못된 진단과 협소한 관점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진보 진영이 진단하는 불평등 문제의 원인은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의 3대 적폐이며, 그러한 진단에 따라 이 적폐들을 해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단과 해법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 때 추진된 최저임금인상의 효과를 자세히 분석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고용을 감소시키면서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선의의 정책으로 인해 나쁜 불평등이 초래된 셈이다.

저자는 더 넓은 맥락에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정책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저해하고 경제 전반의 저부가가치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고부가가치 영역을 제한하고 저부가가치 영역을 지원하는 정책은 경제 전체의 부가가치를 낮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의당이 주장했던 대기업 임원들의 최고임금제한 정책 같은 시도는 국내 인재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중국의 기업들을 유리하게 하고 반도체 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가 불평등에 문제의식을 갖는 진보진영 인사로서 제안하는 해법의 방향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과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며, 평등을 지향하되 경쟁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 정책으로 고등교육의 질을 해치는 것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이 되도록 하면서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는 저소득층에 대한 장학금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복지 측면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의 계층이 노인빈곤층임을 강조하면서 기초연금 상향, 노인일자리 확대, 노후 돌봄 서비스 강화 등 사회의 약자를 돕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로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먼저 진보 진영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이 된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노동 탄압이 오히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누르면서 불평등 감소 요인이 되었고,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임금 격차가 확대되고 불평등 지수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진보 진영의 일반적 인식에 도전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특히 불평등 문제를 가진 자들의 탐욕이나 불공정한 권력 배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같은 구조적이고 거시적 요인에 비롯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에 공감이 간다.

다만, 해법은 지나치게 원론에 머무르고 있고 대안의 범위도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불평등 문제 뿐 아니라 성장과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나, 불평등과 성장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안이나 상충되는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부족했다고 본다. 물론, 책 한 권에서 연구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안에는 한계가 있으니, 진보 진영에 화두를 던지는 역할 이상의 기준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긴 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이 노인빈곤층이기 때문에 노인빈곤문제 해결이 불평등 완화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 과제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동의하지만, 노인이 아닌 사람들을 포함한 불평등 문제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불평등 해소에는 결국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고, 증세에는 국민 저항과 더불어 증세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반대 주장들이 따른다. 그렇다면, 증세와 재정 규모의 확대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진보 진영의 정책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저자가 경쟁력 강화와 계층 간 사다리 구축을 위해 제시하는 방안은 교육 개혁에 많은 비중이 있다. 교육 개혁은 보수나 진보 이념에 관계 없이 폭넓은 동의를 받을 만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교육개혁의 조금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교육정책 만으로 성장과 불평등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이냐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나 임금 양극화 현상이 교육 개혁만으로 해소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수석편집자였던 라이언 아벤트는 <노동의 미래>에서 교육의 향상이 첨단기술 분야의 병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은 될 것이나 노동자 간의 경쟁을 높여 불평등 해소에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진보 진영이 불평등 심화 원인의 핵심으로 짚어 왔다고 하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리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재벌 문제와 관련한 저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이는데,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지만 대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국가가 지원할 대상이고,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등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해서도 지나친 보호적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이해가 된다. 원론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으나, 고부가가치에 대한 지원과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보호 축소의 직접적인 효과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쁜 평등보다는 좋은 불평등이 낫다는 원론적 입장에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불평등 간의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기준들이 현실의 정책들을 다루는 데 적용될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보수 진영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맞서는 진보 진영의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과 고용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정책을 병행한다거나, 기업의 부작용이 심한 규제를 풀어주는 것과 반대급부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규제 정책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입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런 주장들은 보수측 입장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보수 진영과 공통적인 기반을 넓혀 나가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으나, 노동조합 등 진보진영 지지층의 동력을 모아 정치적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수 진영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 주는 이념적 전제들 역시 필요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논리를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있는 논리들이 더 탄탄하게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

성장과 평등에 함께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상충되는 측면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우선주의에 저항하는 평등 지향 정책을 펴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 진영은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을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 머물러야 할까? 또는 보수 진영에서 평등 지향 정책들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평등 지향 정책의 범위를 넓히고 제약들을 넘어서야 할까? 후자를 위해서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지탄받는 정책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이거나, 오히려 성장에도 도움이 되거나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이거나, 아니면 비록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 정도의 손실은 더 큰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 감수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모두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진보 진영은 성장과 국가 경쟁력, 불평등 완화의 가치에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가치들 간의 상충 관계를 최소화하는 정책들을 지향하거나, 상충 관계를 갖는 가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에 근거한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책들은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엽적인 이슈들에 분산되지 않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포괄적인 체계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은 객관적인 사실과 설득력 있는 이론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불평등’은 풍부한 데이터와 간명한 논리들로 하나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정치에서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겠지만,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역량이 없다면 정권을 차지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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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인의 연설에서 별로 감동 받은 적이 없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엔 어떤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의 연설은 재미있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의 연설은 그냥 좋게 보이려는 말들의 성찬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개중에는 대통령의 국정연설처럼 앞으로 자신이 추진하려는 일들의 방향성 같은 것이 들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내용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하긴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의 연설이나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연설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으니, 명연설과 그렇지 않은 연설들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자격은 없다고 하겠다. 고상한 단어들과 이상들로 채워진 정치적 연설에 대한 취향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연설은 아테네 병사들을 추모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과 유명한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처칠의 연설 정도이다. 

한 번 다음 연설의 문구를 읽어 보자. 

헌법은“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합니다. 정치인은 주권자의 대리인입니다. 국민이 맡긴 권력은 오직 국민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서러운 국민의 눈물을 닦고, 절망하는 국민께 꿈과 희망을 드려야 합니다. 강자의 횡포를 억제하고 약자와 동행하며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작년 가을 이재명 대표가 국회에서 한 원대교섭단체 대표 연설의 첫 부분이다. 
따분하다. 정치인이 주권자의 대리인이라는 것, 국민이 맡긴 권력은 국민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말들에서 뭘 느껴야 할까?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말이란, 아무 의미 없는 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기자들에 대한 답변에서도 이재명 대표는 질문과 별 관계가 없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하나마나 한 원론적인 답변에 그칠 때가 많다. 
"검찰이 이번에 새로운 혐의점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번에 또 신작 소설을 쓰는 모양인데 흥행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비명 의원들의 통합비대위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민주주의 정당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재미 없고 아무 유익이 없고 지루하다. 

하지만 한동훈 전장관의 말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항상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다. 재미가 있고 포인트가 있으니까 언론에 계속 해당 발언 영상이 반복적으로 회자가 된다. 
300명의 여의도 문법이 아니라 5천만이 쓰는 일반인의 문법으로 이야기하겠다고 한 말이나, 단식으로 사법시스템이 정지되는 선례가 생기면 잡범들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와 같은 말들이 그렇다.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나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말에 주목하게 만들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한동훈에게는 있다. 

이번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이 언론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그런 '말하는 역량'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다른 정치인의 연설이 이렇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언론에서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연설 중에서 발췌된 두세 문장의 범위를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한 편의 연설 안에 언론과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많은 요소들을 담았다. 

이번 연설에서 개인적으로 주목이 되는 문구들 중에서 몇 가지만 뽑아 얘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은 첫날이니, 저를 이 자리에 불러내 주신 국민의힘 동료 여러분들께 제가 어떤 생각으로 비상대책위원장의 일을 할 지 말씀드리죠.

우선 도입부가 신선하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하나의 간결한 문장으로 연설의 취지를 밝히는데, 이것은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연설을 하는 이유부터 밝히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정치인들의 연설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들고 다닌 적도 있는 만큼, 그런 고대의 연설들의 스타일에 익숙한 바가 있을 것이다. 
다음의 대목들에서도 처칠을 인용하거나 서태지의 노래 가사를 인용한 부분들이 나오는데, 그런 모방과 활용을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좋은 모범들을 가져와 변형시켜 적용하는 일도 역량이고, 청중들에게 한 번 검증된 적이 있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효과가 있으며, 그런 인용이 또다른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당을 숙주삼아 수십년간 386이 486, 586, 686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메시지는 익숙하지만,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 있다. 한때 젊었던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후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 과거의 운동권 경력에 대한 보상으로 특권을 누린다는 것, 민중의 혁명의식을 일깨우는 선도적 엘리트의 역할을 자임했던 계몽적 의식과 행태를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것을 "386이 486, 586, 686이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과 같은 짧고 간결한 표현으로 전달해 낸다. 이런 인식의 타당함을 논외로 하고 표현력에 있어서는 발군이라 하겠다. 

한동훈(앞으로 편의상 직위는 생략하겠다)은 민주당의 핵심적인 약점들을 간결한 논리로 공격하고 처칠을 인용해 가면서 적에 맞서야 하는 절박한 명분을 강조한 다음, 몇 개의 문장만으로 방향을 틀어 주제를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으로 옮기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저는, 정교하고 박력있는 리더쉽이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만날 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표와 개딸전체주의, 운동권 특권세력의 폭주를 막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겨야 할 절박한 이유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이겨야 할, 우리 정치와 리더쉽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위대한 대한민국과 동료시민들은 그것보다 훨씬 나은 정치를 가질 자격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국민의힘이 추진할 정책들의 분야를 열거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한동훈의 경제적인 표현 능력이 드러난다.
 
인구재앙이라는 정해진 미래에 대비한 정교한 정책, .. 안보, 경제, 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을 가속화하는 정책, ..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는 원칙있는 대북정책, 기후변화에 대한 균형있는 대응정책, 청년의 삶을 청년의 입장에서 나아지게 하는 정책, ..

이 문단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분야들을 나열할 뿐만 아니라 각 정책마다 추진 전략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구 정책은 정교하게, 대북정책은 명문과 실리를 함께 살리면서, 기후변화 대응은 균형있게, 청년 정책은 청년의 관점에서라는 식이다. 나는 기후변화 대응은 '과감하고 절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균형있게'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전략의 알맹이들이 불과 몇 개의 단어로 표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과는 한참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들으나 마나 한 원론의 수준에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그가 언급한 '정교하고 박력있는 정책'(이 또한 소수의 단어로 원론을 넘어서고 있는 표현의 예이다)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연설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동료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우리 한번, 같이 가 봅시다.

앞부분은 서태지의 인용이고, 마지막 줄의 앞부분은 노신의 인용, 마지막 문장은 처칠의 연설 마무리를 연상시킨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인용 능력도 역량이다. 문제는 감정에 호소하는 이 문장들이 의도한 효과를 가졌겠는가 하는 것이다. 
연설의 맨 앞에서 밝혔듯이 이 연설의 청중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국민의힘 동료'들이다. 그들에게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연설에 대해 나는 매우 높게 평가한다. 
어떤 메시지를 평가할 때는 먼저 그 메시지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논란의 여지 없이 흠 없는 사람만이 발언과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설을 하는 사람이나 그가 속했던 조직, 새롭게 대표하게 된 정당의 잘잘못은 연설의 가치와 다르게 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언론 보도나 정치인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을 통해 정치를 보면, 정치가 게임과 다를 게 없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누가 이기는지가 전부인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임과 달리, 정치는 '누가 이기는지' 못지 않게, '왜 이겨야하는지'가 본질이기 때문에 그 둘은 전혀 다릅니다. 

국민의힘의 변화, 민주당의 변화, 제3세력의 등장 등으로 앞으로 총선이 어떤 국면으로 진행될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디가 이기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질문은 누가 왜 이겨야 하는가일 것이다. 
한동훈은 핵심을 잘 짚고 있다. 
말의 역량은 생각의 역량이기도 하며 정치의 역량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동훈은 점수를 따고 있다. 
앞으로 닥쳐오는 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통해 그가 어디까지 역량을 증명하는지가 앞으로의 정치인생과 국민의힘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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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씨의 '빅퀘스천'이란 책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고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었다. 검색을 해 보니 관련된 글(인생 시나리오 6가지라면, 당신의 최종 선택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는 여섯 가지 방식 중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리디아의 부유한 왕 크로이소스가 주인공이다. 크로이소스 왕이 자신을 방문한 그리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자 솔론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난 그리스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끝을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크로이소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뿐이지만 나중에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패해 사로잡히고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솔론의 말이 생각난 크로이소스는 그의 이름을 한탄스럽게 외친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키루스 왕이 크로이소스에게 연유를 묻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이 했던 말을 전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키루스 왕은 크로이소스를 풀어주고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마지막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든 끝이 좋으면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고 습관으로는 인생도 한 편의 영화처럼 끝이 좋아야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령화 시대의 현실에서 우리 삶의 가치가 그 마지막 모습으로 평가받는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전쟁과 기아와 여러 위험이 줄어든 현대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노인이 되고 병을 앓다가 죽는다. 죽는 자리에 위로가 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죽은 뒤에 좋은 기억을 간직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재산을 남겨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치매를 앓으며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될지 병실 침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면서 몇년을 지내게 될지 하룻밤 사이에 평안한 죽음을 맞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리스크이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쪽이다. 
절대적인 인생의 의미란 것은 없겠지만, 의미라는 것이 삶을 살면서 지향하는 방향을 정하는 데 활용되는 가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 마지막을 어떻게 맞느냐보다는 그 전까지 내가 할 경험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선균 씨의 죽음은 이르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분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75년생이시니 50년에 조금 못 미치는데,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이선균 씨의 삶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밀도 있게 채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주로 연기를 통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본 작품들은 나의 아저씨, 기생충, 하얀거탑, 골든타임, 검사내전의 일부, 우리선희, 화차, 내 아내의 모든 것, 임금님의 사건수첩 정도이다. 
연기로 보여 준 모습이 본인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그의 연기들에서 느껴졌던 인간성의 결들이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들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 결들이란 무엇이었을까?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 주었던 착함과 성실함과 반듯함과 믿음직스러움이 중심적인 이미지인 것 같다. 하얀거탑의 최도영 의사가 보여 준 강직함이나 화차에서 보여 준 따뜻함, 기생충의 박사장이 보여 준 유능함의 카리스마는 이 중심 이미지들과 겹친다. 한편으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검사내전에 보여준 찌질함과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볼 수 있었던 경쾌함, 우리선희에서 느껴졌던 풋풋함과 고지식함 등 좀 결이 다른 이미지들도 있다.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휴머니즘이다. 그를 떠올리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선량하지만 찌질하기도 한, 부드럽지만 강한, 인간다움이 느껴지고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던 연기자였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이나 이미지들이 실제의 본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연기라고 하는 것은 배우가 연기하려는 인물의 마음을 자신 속에서 재현해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연기되는 인물들은 그 배우가 가진 마음의 가능성의 공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고, 배우라는 존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연기했던 장면들을 기억하면서 그를 추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 가지 장면들을 뽑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 나의 아저씨, 오랜 만에 만난 지안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방백으로 편안함에 이르렀는지 묻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건너 걸어가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망치를 들고 벽을 두드리며 형과 동생을 모욕한 건축업자를 협박하는 장면
  • - 우리선희, 선배와 술을 마시며 '형 내말들어 내말들어 형 내말들어.. 끝까지 파고 끝까지 파야 아는거고 끝까지 파야.."​ 대사를 하는 장면
  • - 검사내전, 카페에서 멤버쉽 쿠폰으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시켜 마시는 에필로그
  • - 골든타임, 사고 치고 자책하고 야단 맞고 성장하는 인턴 의사의 모습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이 있지만 내가 장면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구체적인 장면이랑 매칭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경찰 조사를 받기 전후에 기자들 앞에서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하거나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고 이야기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던 모습에서는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로선 남아 있는 길 중 최선이라고 생각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영화와 광고 등의 위약금으로 100억원 정도를 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기사도 보았는데, 연예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책임을 요구 받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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