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불평등>은 2022년 출간된 책으로, 문재인 전대통령이 추천하는 등 화제에 많이 올랐던 책이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은 우선 그 역설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끈다. 우리는 보통 불평등이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은 불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랜 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민주당 소속의 정책전문가인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난다면, 이 독후감을 읽기 전에 책을 먼저 직접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설책을 읽듯,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데이터와 논리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답변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독후감은 일종의 스포일러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좋은 불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늘어남으로서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불평등이다. 저자는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 좋은 평등과 나쁜 평등의 네 가지 차원을 구분하는데, 나쁜 불평등은 저소득계층의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우, 좋은 평등은 그 반대의 경우, 나쁜 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불평등이 완화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역사를 주요한 변곡점으로 경계가 지어지는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하는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지는 불평등의 지속적 심화는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급성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1992년의 한중수교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주요 이벤트로 삼는 중국 경제와 무역의 급격한 성장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중국수출 역시 급증하면서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통해 대기업 임직원들의 보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 불평등 확대의 주 요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의 신발산업과 대구의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저기술 산업은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사양화되고 관련 종사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줄어들면서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2007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기업의 성과를 줄이면서 불평등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와 미중 갈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불평등의 확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전자가 좋은 불평등의 사례라면 후자는 나쁜 평등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저자는 여러 가지 데이터로 뒷받침하는데, 나한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88년에서 2008년 기간 동안 글로벌 소득 분위별 실질소득 상승률을 표현한 그래프였다. 오른쪽 방향으로 서 있는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코끼리 곡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전세계적으로 코끼리 등에 해당하는 하위 10~60% 계층은 소득상승 비율이 높은 반면, 코끼리의 굽어진 코 아랫면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20% 부근 계층은 실질소득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전자는 주로 중국으로 대표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의 국민들이고, 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중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권자들이 이민을 거부하고 자국의 기존 엘리트계층을 불신하면서 이에 편승하는 극우 정파를 지지하는 현상을 일부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해법이 잘못된 진단과 협소한 관점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진보 진영이 진단하는 불평등 문제의 원인은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의 3대 적폐이며, 그러한 진단에 따라 이 적폐들을 해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단과 해법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 때 추진된 최저임금인상의 효과를 자세히 분석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고용을 감소시키면서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선의의 정책으로 인해 나쁜 불평등이 초래된 셈이다.
저자는 더 넓은 맥락에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정책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저해하고 경제 전반의 저부가가치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고부가가치 영역을 제한하고 저부가가치 영역을 지원하는 정책은 경제 전체의 부가가치를 낮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의당이 주장했던 대기업 임원들의 최고임금제한 정책 같은 시도는 국내 인재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중국의 기업들을 유리하게 하고 반도체 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가 불평등에 문제의식을 갖는 진보진영 인사로서 제안하는 해법의 방향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과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며, 평등을 지향하되 경쟁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 정책으로 고등교육의 질을 해치는 것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이 되도록 하면서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는 저소득층에 대한 장학금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복지 측면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의 계층이 노인빈곤층임을 강조하면서 기초연금 상향, 노인일자리 확대, 노후 돌봄 서비스 강화 등 사회의 약자를 돕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로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먼저 진보 진영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이 된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노동 탄압이 오히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누르면서 불평등 감소 요인이 되었고,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임금 격차가 확대되고 불평등 지수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진보 진영의 일반적 인식에 도전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특히 불평등 문제를 가진 자들의 탐욕이나 불공정한 권력 배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같은 구조적이고 거시적 요인에 비롯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에 공감이 간다.
다만, 해법은 지나치게 원론에 머무르고 있고 대안의 범위도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불평등 문제 뿐 아니라 성장과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나, 불평등과 성장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안이나 상충되는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부족했다고 본다. 물론, 책 한 권에서 연구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안에는 한계가 있으니, 진보 진영에 화두를 던지는 역할 이상의 기준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긴 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이 노인빈곤층이기 때문에 노인빈곤문제 해결이 불평등 완화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 과제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동의하지만, 노인이 아닌 사람들을 포함한 불평등 문제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불평등 해소에는 결국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고, 증세에는 국민 저항과 더불어 증세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반대 주장들이 따른다. 그렇다면, 증세와 재정 규모의 확대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진보 진영의 정책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저자가 경쟁력 강화와 계층 간 사다리 구축을 위해 제시하는 방안은 교육 개혁에 많은 비중이 있다. 교육 개혁은 보수나 진보 이념에 관계 없이 폭넓은 동의를 받을 만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교육개혁의 조금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교육정책 만으로 성장과 불평등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이냐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나 임금 양극화 현상이 교육 개혁만으로 해소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수석편집자였던 라이언 아벤트는 <노동의 미래>에서 교육의 향상이 첨단기술 분야의 병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은 될 것이나 노동자 간의 경쟁을 높여 불평등 해소에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진보 진영이 불평등 심화 원인의 핵심으로 짚어 왔다고 하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리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재벌 문제와 관련한 저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이는데,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지만 대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국가가 지원할 대상이고,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등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해서도 지나친 보호적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이해가 된다. 원론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으나, 고부가가치에 대한 지원과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보호 축소의 직접적인 효과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쁜 평등보다는 좋은 불평등이 낫다는 원론적 입장에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불평등 간의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기준들이 현실의 정책들을 다루는 데 적용될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보수 진영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맞서는 진보 진영의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과 고용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정책을 병행한다거나, 기업의 부작용이 심한 규제를 풀어주는 것과 반대급부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규제 정책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입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런 주장들은 보수측 입장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보수 진영과 공통적인 기반을 넓혀 나가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으나, 노동조합 등 진보진영 지지층의 동력을 모아 정치적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수 진영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 주는 이념적 전제들 역시 필요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논리를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있는 논리들이 더 탄탄하게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
성장과 평등에 함께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상충되는 측면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우선주의에 저항하는 평등 지향 정책을 펴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 진영은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을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 머물러야 할까? 또는 보수 진영에서 평등 지향 정책들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평등 지향 정책의 범위를 넓히고 제약들을 넘어서야 할까? 후자를 위해서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지탄받는 정책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이거나, 오히려 성장에도 도움이 되거나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이거나, 아니면 비록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 정도의 손실은 더 큰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 감수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모두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진보 진영은 성장과 국가 경쟁력, 불평등 완화의 가치에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가치들 간의 상충 관계를 최소화하는 정책들을 지향하거나, 상충 관계를 갖는 가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에 근거한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책들은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엽적인 이슈들에 분산되지 않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포괄적인 체계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은 객관적인 사실과 설득력 있는 이론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불평등’은 풍부한 데이터와 간명한 논리들로 하나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정치에서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겠지만,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역량이 없다면 정권을 차지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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