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핵심 개념은 물론 도이다. 

도는 길, 즉 따라가는 어떤 궤도를 뜻한다. 

도는 천지의 시작부터 계속하여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를 주재하는 원리이다. 

행성들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대기는 순환하며, 생명체는 진화의 경로를 걷고, 인류의 역사도 진화해 나간다. 

도는 세상 모든 사물에 작용하고, 그 대상에서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주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감각을 받아들이고 이성의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며 실행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프레임에선 나와 세상은 어떤 경계로 나누어져 있고 나는 세상의 법칙에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그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결정한다. 

하지만, 도에 따라 세상 만물이 변천해 가고 그 과정 중에 놓여 있는 작은 매개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프레임이 달라진다. 

도는 바람을 움직이듯 나의 몸을 움직이고 나의 정신을 움직인다. 

나는 나의 정신의 주인인 듯 여기지만, 내 정신은 몸의 상태, 외계의 자극,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상념들, 내가 알지 못하게 갖고 있는 전제와 편견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아마도,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듯 외치는 자아의 소리를 낮추고 세상을, 그리고 나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것이 도에 다가가는 한 방법일 것이다. 

자아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하지만 넓은 시야로 보자면, 나는 유유하게 움직이는 넓은 세상에 잠시 몸을 담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다만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인지, 아니면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나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없는 부분들은 내게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 

나를 중심으로 한 관점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세상의 한 부분으로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얻어내느냐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이 얻어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고 도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하나의 궁극적인 동기만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열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 나를 데리고 간다. 

믿음과 충동, 이성과 감정, 배고픔과 외로움, 목적과 결심, 두려움과 희망, 사상과 환상이 우리를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어느 바람을 따르든 도를 따르는 것이지, 도에 따르는 사람과 도에서 벗어난 사람 사이에 구분이 있는가? 

되는대로 충동에 따라 사람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투쟁하듯 사는 사람,

남들과 비슷하게 평범한 생활을 하며 가족을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

더 많은 명예와 지위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

일상적인 생활의 여유는 최소한으로 누리면서 음악이나 글쓰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보람을 찾는 사람, 

누가 도를 따르고 누가 도에서 벗어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노자라면 어떻게 답변하였을지 모르겠다. 

내 의견으로는, 도의 기준으로 어떤 삶을 더 낫다, 낫지 않다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후적으로 보자면,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은 것이고, 각자의 도에 따라 산 것이다. 

그렇다면 도라고 하는 개념에 어떤 소용이 있을까? 도에 부합되게 살고자 노력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도라는 개념은 딱 한 단계 더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든, 가치관이든, 충동이든, 감정이든, 

자신을 하나의 방향으로, 외곬로 몰아갈 때, 

도를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 그 무엇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자신이 집착하고 있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큰 도의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도라고 하는 개념의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의 바람에 휩쓸려 가다가, 그 바람을 빠져 나와 자신의 안과 주변을 불어 가는 바람들을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서, 

바람의 힘들을 엮고 스스로의 작은 힘을 보태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인의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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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나의 바람을 빠져나온다고 해도 그곳에도 바람은 불고 있을 것이고, 청정한 관조의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딱 한 단계 더 초월한다는 표현을 썼다.

전체를 조망할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런 존재가 있다면 신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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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1장에서는 실천적 지침을 따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지만, 1장에서 표현된 내용들만으로도 노자적인 태도, 사고방식, 습관 같은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도가도 비상도 라고 하는 말은, 어떤 것을 옳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이 있는 옳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모습들을 보면, 자신의 절대적인 옮음에 집착하는 듯한 태도가 하면 자신의 옳음에 스스로 제한을 두는 태도가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문재인 전대표가 더민주당의 야권통합제의를 거절한 국민의당에 대해 평가한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일단 평가부터 먼저 하자면 국민의당은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당이 새정치 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공천받기 위한 정당이 됐죠.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법으로 새정치를 어떻게 하나. 당원구조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정당문화를 만들어야 가능한 건데 선거시기에 공천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당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냉정하게 말하고 싶다. 그게 현실속에서 확인되고 있는 거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에요...."

메시지를 떠나서,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표현들이 눈에 띈다. 

물론 이런 표현들은 다른 정치인도 많이 사용하고, 위의 예에서 문재인 전대표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전대표의 경우 다른 정치인과 비교를 해 보자면, 내 말이 옳고 당신이 틀렸다, 보다, 나는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 라는 인식이 더 강하게 나타나 보일 때가 많다. (문재인 전대표 인터뷰 전문)

다른 예로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가 전투에서 쓰러진 시민들을 위해 한 추도사의 첫 부분을 보자. 

"오늘까지 이 연단에 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몰자들에게 조사를 바치는 것을 옳다고 보고, 이 연설의 관례를 법으로 정한 인물을 칭찬해왔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행동으로 나타난 그 명예는 행동으로 표창되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공중의 손으로 준비된 이 매장행사를 여러분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이, 다수인의 덕행이 한 개인에게 맡겨져 그 사람의 뛰어나거나 혹은 서툰 연설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중략) 그러나 옛 사람들이 이런 관습을 좋은 것으로 인정한 이상, 나도 그법에 따라 되도록이면 여러분의 생각과 희망을 표현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이 연설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 주장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견해 중의 하나인 것처럼 소개가 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처칠의 연설과 같은 단호한 스타일을 더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항상 단언하는 듯한 표현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유보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그래, 내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잖아", 라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사실, 일종의 비판을 두려워 하는 비겁함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단언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는 원인인 경우도 많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고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굳이 넣을 필요가 없는 유보적 표현들을 문장에서 생략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많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은 이래, 라는 식의 힘없는 주장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힘도 열정도 없이 단견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신이 한 단계 위에 있다는 것을 보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과, 세상에 자기들만 옳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다 천하의 악인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처럼 매도하는 목소리 큰 사람들 틈에서, 신념에 충만하지만 그 신념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함께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의 낮지만 확고한 음성이 들릴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조화이며, 품격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진리나 올바름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이 붙잡은 도의 단면을 표현하는 데 성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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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갖고 노자 도덕경 1장을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한다. 
1장은 윤리적인 판단이나 지침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노자 사상의 전제와 기본 태도를 보여 주는 중요한 부분이라, 한 번 더 짚어 보고자 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교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요함(경계를 이룸)을 본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을 달리하니, 
함께 일컬어 어두운 것이라고 한다. 
어둡고 또 어두우니, 수많은 묘한 것들의 문이 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첫 줄이다. 
노자는 도, 즉 진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도는 천지의 시작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고,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삼라만상의 변화를 주재하는 원리이다. 
이 도에는 자연 세상의 법칙도 있을 것이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움직이고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원리도 있을 것이다. 
소를 잡는 백정이 몸에 익힌 도도 있을 것이고, 서생이 암자에 앉아 공부하며 깨우치는 수신의 도도 있을 것이며, 군주와 책사가 실천하며 깨달아가는 천하의 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도이든 간에, 사람이 생각으로 이해하고 말로 표현한 도는 실재의 도와 격차가 있다. 
언어는 사물들을 서로 구분(경계)짓는 데 사용되는 것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믿든,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주장하든, 어떤 평가와 판단을 내리든, 그것은 실재의 도와 차이를 갖는 한정적인 진리이다.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언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관기묘, 즉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도의 모습, 세상의 미묘한 부분들을 얼핏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런 방식으로 노자는 두 가지 입장과 차이를 둔다. 
그 중 하나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이다.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어떤 것을 믿든, 어떻게 살든 다 마찬가지이고, 개인의 취향과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노자는 도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자유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인간 역시 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자는, 사람의 인식과 언어는 언제나 실재의 도를 온전하게 붙잡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명분이나 진리로 여기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아직 노자는 실천적인 지침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노자가 1장에서 제시한 전제 위에서 권고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더 뒤의 내용을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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