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그렇기 때문에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고, 가다듬은 소리와 자연스러운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를테면 장단상교를 길고 짧음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경우, 나로서는,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네가 나보다 키가 크더라도 넌 마이클 조던에 비하면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없어.
그래서 뭐? 그래도 너보다 큰 건 맞잖아. 

유무상생이나 난이상성. 그릇 안의 공간을 무라고 한다면, 그 무는 그릇이라고 하는 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쉬운 일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 모든 일이 똑같은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면 어려움이나 쉬움이라는 개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내 생각에, 노자는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음과 낮음이라는 개념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자가 부정하는 것은, 이 다른 것들 중의 한 쪽을 편들어 그것을 아름다움이나 선이라고 부르고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의 내용과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강하고 높은 것을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크고 강하고 높은 것들은 작고 약하고 낮은 것들과 어울려서 세상을 이룬다. 
우리는 크고 강한 것이 승리하리라 믿기 때문에, 또는 크고 강해지면 행복해지리라 믿기 때문에 크고 강한 것을 아름답고 선하게 여긴다. 
하지만 작고 약한 것이 승리할 수도 있으며, 크고 강해지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유무, 난이, 장단, 고하 등은 주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미와 선은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미와 선 같은 개념들도 확정지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의지에 따라 임의대로 규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변경할 여지를 갖고 있지만 자유로운 재량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데, 우리가 추하게 느껴지는 것이 실제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떤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아닌지는 사람마다도 다르고 한 사람에게라도 때와 상황, 우리가 품고 있는 여러 생각들, 기억들, 믿음들, 습관들에 의해 달라진다. 
특히 어떤 것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내어 갖고 있는 개념들, 관점들에 영향받는 바가 크다. 

사람들은 보통 높은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고 그것을 얻는 데 최선을 다한다. 
노자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높은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낮은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높음과 낮음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아름다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어떤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추하게 느껴진다. 그런 것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규정짓고 그것을 얻는 데에 집착하는 것 대신, 무엇을 아름답다 추하다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울리며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노자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다음 구절과도 연결이 된다.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은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을 취하니, 
행하되 말을 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추구하고 실행하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하는 자는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가지 않는다. 

무위라는 말은 보통 얽매이지 않음 정도로 해석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이라고 표현을 해 보았다. 
아름다움과 선함을 위해 일을 하되,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을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이라고 구태여 일컫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굳이 음식을 아름다움이나 선이라고 가치화할 필요는 없다. 
음식을 가치화한다면,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비유는 좀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방식이 이 비유에 많이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지혜를 가진 성인이라면, 추구하는 일이 배고플 때 음식을 찾는 일처럼 자연스러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높은 것을 낮게 만들고 낮은 것을 높게 만들거나 더 낮게 만들면서도, 높은 것이 아름답지 않아 낮게 만들었다거나 낮은 것이 아름다와 더 낮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배고픔이 음식을 찾는 길로 사람을 이끌 듯, 우리의 본성과 의지가 우리를 도로 이끈다. 
성인이란, 풍부한 지혜로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니 그에 대해 말을 하거나, 당신도 나처럼 해 보라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이룬 일을 자랑하거나, 과거에 이룬 일에 머무르고 댓가를 기다리며 노력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다른 존재와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으며, 정직한 정치인이 이제까지 자신이 이룬 공로나 그에 따르는 명예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을 만한 지혜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성인의 모습을 지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아름답고 선한 대상을 추구하는 것 이전에,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들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사물들을 공평하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길을 멈추지 않고 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들로 이름지은 것 너머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그 길 위에서 종종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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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천하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일컬으면 이미 미운 것이다. 
모두가 선하다고 아는 것을 선하다고 일컬으면 이미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고,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은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을 취하니, 
행하되 말을 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추구하고 실행하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하는 자는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가지 않는다. 

해석이 쉽지 않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첫 문장만 해도 여러 해석이 있는 것 같다. 
첫 문장을,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아는 것은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만약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은 나한테는 와닿지 않는다. 

천하가 아름다운 것으로 아는 것이라도 나한테는 추하다, 또는 실제로는 추한 것이다, 이런 해석은 어떨까?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체험된다는 뜻일까?
즉 인식의 주관성과 상대성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겠지만, 그 함의를 잘 모르겠다. 
이 장은 계속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이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뒷부분까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비상명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해 보았다. 
즉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라도 그것에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위'라는 한자에는 행한다, 위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선 말한다는 뜻으로 보았고, 사오미는 이미 추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보았다. 
또는, '위'를 위한다는 뜻으로 보고, 천하가 다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숭상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뜻은 좀 다르지만 취지는 비슷해 보인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과 거리가 생기는 듯한 느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나는 널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듯한 느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떠한 것을 어떠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어떠함이 덜해지는 경우들이 있지 않은가. 
아마 감정이 충분히 차 올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큰 해가 없을 것이다. 
말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잘 쓰여진다면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무언가 가치있는 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면 순수성은 훼손되고 만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스스로 국가에 대한 강한 애국심을 표현할 때 그 애국심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건 타인 뿐만 아니다. 
만약 자기반성적인 사람이라면 자기가 표현하는 애국심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약간이라도 과장된 감정이 아닌 것인지 하는 일말의 의심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표현된 것과 표현 사이의 거리를 느끼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아름답다고 의식적인 가치 평가를 하는 순간, 그 평가된 가치는 검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명가명,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충분했을 상황에서 가치를 평가를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치 평가란 것은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대안들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멀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가란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가를 통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가리고, 가치 있는 것과 가치가 적은 것을 구분한다. 
우리가 개념화를 통해 대상을 추상화하고 세부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평가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평가를 당하는 대상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가치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있느냐의 관점으로만 보이게 된다. 

심지어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린 아이들한테 칭찬을 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고 한다. 
노력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아이에게 뿌듯한 기분을 주고 노력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칭찬은 기분을 좋게는 하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도하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자신이 칭찬받았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가 강조하는 도는 길이고 흘러감이고 걸어감이고 노력함이다.
이에 반해 명은 고정된 것, 변화하지 못하는 것,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일컫는 것은 어떤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고, 명으로 도를 재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명가명 비상명.
아름답다고 이름 붙여진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착한 일을 행하고자 노력하고, 명에 집착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결론적으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고 아름다움은 주관적, 상대적인 가치이다, 라는 류의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 그런 가치 평가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취지는 비슷하다. 
노자의 문장들에 세밀한 해석은 서로 달라도 대체적으로는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해도 나한테는 추한 것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은 가치를 평가하는 일 자체의 문제점은 별로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일 자체를 그만 두어야 한다, 라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여기에 내 절충주의적인 태도를 더하자면, 
앞서 유욕을 버리고 무욕만으로 살 수 없고 언어를 버리고 묘함을 보면서 살 수만도 없다고 했듯이, 가치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살기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와 목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듯이, 언제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가치를 평가하는 습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해석을 하면 2장의 첫부분은 1장의 연장선 상에서 논리를 이으면서 같은 장의 뒷부분으로도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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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 비상도. 

이 말을 받아들이는 데 첫째 난관은, 과연 정말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붙잡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천수백년 전의 노자가 살던 시대에 비하자면 자연과학과 수학은 상상 못 할 만큼의 발전을 했다. 
과학은 변하지 않는 도를 밝혀내고 있지 않은가. 
노자가 말하는 도에 불변의 과학적 진리는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앞의 글에서 답변을 시도하였다. 
충분하지는 않아 보이나, 내 입장은 이렇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고, 그것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복잡성이 너무 높아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적용하기 힘든 영역, 그리고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 연관된 영역에서는 그러한 절대적 진리를 포착해 내기 힘들다. 
복잡성의 문제는 학문의 발달로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경험, 의미, 가치에 관련된 명제들은 말로 표현은 할 수 있어도 불변의 진리를 포착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붉은 색을 빛의 파장으로 계량화할 수 있지만, 붉다는 것에 대한 체험은 언어나 과학으로부터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도는 세계, 물질의 세계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포함된 세계가 변화해 가는 궤적이자 그 변화를 주재하는 원리이다. 
앞서 말한 한계들로 인해 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우리의 인식으로 정확하게 포착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노자가 명(이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에는 명의 역할이 있다. 다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유욕이관기묘 무욕이관기요. 
욕심이 없음으로 묘함을 보고 욕심을 갖고 요함, 즉 사물들의 경계를 본다. 
무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유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욕구를 충족시키고 인식을 고도화해 나가는 데에는 개념과 의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개념적 인식과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 사로잡힌 인식 만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개념의 틀로 포착되지 않는 섬세한 부분들, 그리고 목적의 달성과 무관한 대상의 모습들이다. 
유욕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무욕의 상태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살아가는 데에는 아마 유욕과 무욕의 상태를 넘나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노자에서는 무욕 쪽에 중점이 있다. 
유욕의 상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 온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의 틀로 세상을 본다. 
노자는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환기시켜 준다. 

그럼 노자가 시사하는 바에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해 볼 수 있을까?
목적을 추구하는 주체의 역할을 멈추어 보는 것. 
내가 추구해 오던 목적들과 상관 없이 한 번 존재해 보는 것.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들을 줄여 보는 것.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해야 한다, 무언가 좋은 것을 시간에게서 얻어내야 한다, 더 낫게 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그냥 지내선 안된다, 이런 생각들의 소음을 지워 보는 것. 
절대적 진리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자신의 인식 틀을 잠시 빠져 나와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러기 위해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벗어나 보는 것.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 보는 것.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존재해 보려고 하는 것. 
그런 방향으로 마음을 다스려 보는 것.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 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또다른 난관이다. 
인간은 목적, 동기, 충동, 욕구, 믿음, 무의식, 이런 것들이 다 종합된 존재인데 어떤 부분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모습이 '있는 그대로' 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욕정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 이성적으로 정한 목적의 달성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 욕망을 줄이고 유유자적 하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는가. 
이 부분은 내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엔 상대적인 개념일 것 같다. 
우리가 가진 목적이나 개념적 인식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즉 무엇을 원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무엇이 어떤 개념으로 인식되면 그 개념이 무엇의 본질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도 인식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의 목적과 믿음과 욕구들에 대해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시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 가능해지고, 또한 집착과 강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도가도 비상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 안에 있다. 
도 안에서 체험하고 존재하고 변화한다. 
우리가 도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한계 너머에 다함이 없는 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몫 만큼의 주어진 길을 가도록 하자. 

자유롭게, 충실하게, 충만함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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