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북

저자
사이먼 싱 지음
출판사
영림카디널 | 2003-04-10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인류는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암호도 사용해 왔다. 비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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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2015)

The Imitation Game 
8.4
감독
모튼 틸덤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알렌 리치, 매튜 비어드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영국, 미국 | 114 분 | 2015-02-17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코드북인데,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화인 에니그마 깨뜨리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상당히 여러 가지 테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 동성애, 암호, 비밀, 사람들 간의 소통, 남녀차별, 생각하는 기계, 환영받지 못하는 천재, 거짓말, 개인과 역사.. 

메시지를 암호화하고 그것을 해독하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 의미를 주고 받으면서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과 닮았다. 
암호 푸는 일에 매달리는 튜링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의 뜻을 이해하는 일에 서투르다.  
명료하고 돌려 말하는 일이 없는 수학의 언어를 튜링은 천재적으로 다룰 수 있고 생각하는 기계까지 구상하지만, 사람들과 생각과 감정을 주고 받는 일에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낮은 수준이다. 

그렇지만 그는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과 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유별난 사람의 봉사 덕분에 1400만명의 목숨이 구해졌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 때문에 폐인이 되고 희생당한다. 

사이먼 싱이 쓴 코드북이라는 책은 암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룬 책인데 그 중 한 장을 온전히 에니그마 이야기로 쓰고 있다. 
튜링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에니그마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에니그마는 원래 수학적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니그마는 타자기 비슷하게 생겼는데, 메시지를 송신하는 사람이 알파벳 글자를 누르면 다른 글자로 바꾸어 준다. 
그런데 어떤 글자가 어떤 글자로 바뀔지는 기계 내부 동작에 의해 계속 달라진다. 
예를 들어 똑같은 A를 쳐도 어떨 때는 C로, 어떨 때는 E로 대치된다. 
그리고 에니그마 기계의 세팅에 따라 글자가 대치되는 방식이 달라진다. 
에니그마의 위력은 가능한 세팅의 종류가 1경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니그마 기계를 갖고 있고 암호문이 있더라도 에니그마를 어떻게 세팅해 놓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소용이 없었다. 
반면 세팅에 대한 정보 자체는 단순했다. 
독일군끼리는 이 세팅에 대한 정보(key)를 공유했기 때문에 서로의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key 값은 매일마다 달라졌다. 
key만 보호하면, 암호화 알고리즘과 암호화된 메시지를 알더라도 해독할 수가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은 공인인증서 등에도 사용되는 일반적인 암호화의 요체이기도 하다. 

해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에니그마의 암호화 방식을 깨뜨리는 단서를 발견한 것은 폴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방심하고 있던 시절부터 독일의 위협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호 해독법 발견에 몰두했다. 
그들은 성공했지만 독일이 에니그마의 보안성을 강화하면서 무용지물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의 침공을 2주 앞둔 시점에 자신들의 성과를 영국과 프랑스에 전달한다. 
연합국의 승리는 상당 부분 폴란드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한 암호해독가가 몇 사람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블레츨리 파크에서 실제로 일한 사람의 수는 200명 남짓으로 시작하여 7,000명까지 늘어났다. 
튜링은 여러 팀 중 한 팀의 팀장이었다. 

폴란드인들 덕분에 암호해독가들은 초기부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독일이 영국을 공습하던 때도 이들 덕분에 영국은 독일 공군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 보면서 대응할 수 있었다.
튜링의 역할은 독일군이 자신들이 이용했던 에니그마의 약점을 알아채고 보완하는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처럼 튜링은 크립이라고 불리우는 단서들, 즉 항상 같은 시간에 송신되는 일기예보에 날씨라는 단어가 들어있다거나, 어떤 독일군 병사가 항상 똑같은 암호key(애인 이름)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단서들을 이용한다는 착안을 했다. (에니그마의 암호key는 매일마다 바뀌지만 독일군 전체가 공유하는 key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송신자가 임의로 정하는 key로 구성되었다.)
이 단서들을 이용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보다도, 이 단서들에 튜링이 고안한 수학적 방식을 적용해서 가능한 경우의 수를 크게 줄인 점이 튜링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튜링은 경우의 수를 엄청난 비율로 줄여 놓은 다음, 그래도 여전히 많은 경우의 수를 자동으로 체크해나가는 기계를 고안했다. 
사실 폴란드인들도 기계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튜링은 효과적으로 기계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발견하고 적용한 것이다. 

튜링이 이런 아이디어의 돌파구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현한 기계가 처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3월이었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기계의 속도가 빠르지 않아 기계 성능을 개선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독일군이 우려했던대로 폴란드인이 이용했던 암호의 약점을 보완한다. 
이로 인해 몇 달 간 정보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으나 성능이 개선된 기계가 도착하면서 해독 작업이 다시 제 궤도에 오른다. 
즉, 연합군은 전쟁 중간의 몇 달을 제외하고는 전쟁 초기부터 어느 정도 암호 해독에 성공하고 있었다. 
다만, 독일군 중에서도 해군의 암호는 특히 어려웠기 때문에 해독이 늦어졌다. 
독일 해군의 암호를 풀기 전까지 연합군은 유튜브에 의해 수많은 수송선과 전투선이 침몰되는 피해를 겪어야 했지만 암호 해독과 더불어 바다에서의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독에 성공한 후에도 영화에서처럼 에니그마 암호가 깨졌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하지 못하고 아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겠지만 아마 튜링의 팀이 아니라 작전을 하는 군대의 소관이었을 것이다. 
암호해독가들은 크립을 찾아내고 이용하는 등 암호를 해독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것이다. 

책에서 묘사되는 튜링의 모습은 영화와는 좀 다르다. 
튜링의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앨런 튜링이 천재라는 점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이하기 쉬운, 친근감 가는 천재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아이디어를 남에게 설명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처칠에게 투서를 한 것은 튜링 혼자 한 일이 아니었고 팀이 함께 한 일이었다. 
또한 암호해독에 성공하기 전에 기계에 대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암호해독이 이미 제 궤도에 올랐을 때 해독 작업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사람을 더 뽑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가 실화의 많은 부분을 따라가고 있긴 하지만, 주제를 더 강조하기 위해 상당한 윤색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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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에서는 선하다는 것과 좋다라는 것은 좀 다른 의미를 갖는데, 영어에서 'good'이라는 단어가 양쪽 모두의 뜻으로 쓰인다. 
선하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 자기의 이익 못지 않게 다른 사람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적 기준을 잘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약간 낯설 수도 있는 관점에서, 선하다는 것은 유능하다는 것이다. 

윤리적 관점에서의 선함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해 갖는 영향력에는 그 사람의 선한 의도 뿐 아니라 유능함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의도는 선하지만 무능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한 것일까? 

이런 식의 사고를 밀고 나가면, 니체식으로 도덕을 지킨다는 건 약함의 표시이고 강함이야말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능력있는 상사가 착한 상사보다 낫고, 유능한 지도자가 도덕적인 지도자보다 나으며, 착한 남자친구보다 능력있고 재미있는 남자친구보다 낫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가치, 선, 착함, 능력, 윤리, 좋음과 같은 개념들이 이리저리 섞여서 이야기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기 쉽다.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도덕성, 선량함, 능력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능력이 곧 선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능력을 선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한다 라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착하다는 것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양보하고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성격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선하다는 것은 착한 것과는 좀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우선 도덕적 기준을 따르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적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르다. 
구체적인 도덕적 기준은 다르더라도 자기의 충동이 아니라 윤리와 양심에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을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의 충동과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복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정의에도 어려운 점이 있다. 
예를 들어 군부독재시대에 고문에 종사한 사람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간첩을 잡아내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가 만약 고문하는 일에서 쾌락을 느꼈다면 악한 것이고,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참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그 일을 했다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정말 자기 소신으로 그렇게 믿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양심의 눈을 가린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당신이 하는 행동의 동기가 정말 선한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의 만족감과 자긍심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진 이기심과 양심의 정도는 서로 다 비슷한데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닐까? 

내 생각에 선하다는 것은 제약이 많이 따르는 개념이다. 
선한 사람과 선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선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이라는 개념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자기 자신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을 위한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 자신의 심리적 필요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선해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동기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어떤 행동은 하는 것이 옳고 어떤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그 행동의 영향이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보일 때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옳다는 판단과 내 실제 행동이 일치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함의 의미이다.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은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합리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옳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꾸준하게 해 나갈 때 사람은 새로운 판단력과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선함이란, 일관성에 가까운 뜻이 된다. 

선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 적용할 때는 좀 다르다. 
우리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착한 몸매' 같은 용법에서 그런 감수성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좋음'이나 '훌륭함'과 다른 뜻을 가지는 '선함'의 영역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사심없이 남을 위하는 행동이나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일종의 감탄 같은 것을 느낀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순수한 관심,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 
그런 감정을 스스로 느낄 때는 선하다는 평가를 할 수 없다. 
평가를 하는 순간 그 감정은 변질이 된다. 
(스스로가 선하다는 인식과 순수한 감정이 병존하는 환희의 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선함을 느낄 때, 또는 그런 감수성이 그 사람의 특질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좋은 예술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선량한 사람에게서 느끼게 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스스로는 선해지려고 하지 마라. 다만, 선한 행동을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관대함을 갖고 선량함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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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멸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가 올 것이다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부분은, 자본주의가 악하기 때문에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법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멸망할 것이라는 부분이다. 
그의 예언은 물론 틀렸고, 이론에는 한계가 많다. 
생각해 보면, 그는 19세기의 수많은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론에서 틀린 점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이 완전히 유효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부당하고 사악한 대변자 역할을 했던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에 더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들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고 경제력이 집중되고 있다. 
경제력 집중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고도화와 다가오는 파국의 징후이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을 보자.  
자본은 본성 상 지속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가는데, 초기의 자유경쟁은 점차 소수의 독점자본 간 경쟁으로 바뀌어 간다. 
자본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져가고, 자본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곳을 찾지 못한다. 
자본의 수익성은 하락하고 공황이 찾아오며, 소외된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자본, 즉 생산수단을 공공의 소유로 만든다. 
이 그림은 80년대보다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많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교정을 통해 지속해 나간다. 
현대의 자본주의국가는 독점을 막기 위해,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부가 재분배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사이에는 중간적인 사회들이 많이 존재하고 어떤 국가든 순수한 자본주의 원리에만 맡겨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들이다. 
그렇지만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역할은 자본의 논리에만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권을 가진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부분도 상당히 높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부르주아와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제한적이다. 
부유하고 이기적인 자본가와 열악한 공장 환경에서 단조로운 노동에 종사하는 극빈층 노동자의 모습은 그다지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억대 연봉을 받는 전문직과 대기업 근로자 뿐 아니라,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도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처럼 계급적 갈등이 심화되기보다는 사회 계층이 다양해지고 일원적 잣대로 규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은 19세기의 관점을 담은, 제약이 많은 이론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생명력을 갖는 것은 다른 주장이 갖지 못하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그리고 영감을 주는 통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본주의는 영속적인 사회질서라기보다 끊임없는 자기조정을 통해 건강성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불안정한 체제이다. 
자유시장 이론은 무한경쟁이 시장을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면 시장이 개입하여 새로운 경쟁자가 이익을 나누어 갖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대자본과 소자본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그 불공정함은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심화된다. 
현재의 대자본은 과거의 대자본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힘의 편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한 경제력의 집중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소외되게 만들고 자본 스스로의 성장 활로를 찾기 힘들게 만들어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역사가 10년 남짓 밖에 안되는 IT 혁신 기업들이 전통적인 대기업들을 망하게 하는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본이 없이 아이디어와 프로그래밍 실력만 가진 젊은 창업가들이 몇 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업을 일구어내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새로운 귀족이 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싶다. 
작은 회사가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벤처캐피탈이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에 자본을 투자하여 성장시키는 것이다. 
대박을 내는 아이디어와 드문 재능을 갖춘 일부의 성공신화에 가리워져 그 뒤에 동작하는 자본의 힘이 가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대기업총수와 일반적인 근로자를 대비시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에 가깝게 자본과 노동의 상징을 찾아보자면, 
남들보다 탁월한 실적을 내는 전문직 근로자와 대리기사를 비교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대리기사는, 차별화된 능력에 따라 성과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표적인 직업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실적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개인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자본을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노동을 '갖추어진 것에 의존하지 않고 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비록 억대 연봉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자본과 노동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가 고도화될 수록,  아무 가진 것 없이 각별한 노력으로 자본을 갖추어나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부잣집 자식들이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성격도 좋고 친화력도 좋다. 
사회적 자본을 쌓아가는 역량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인데, 그런 능력도 가정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재산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그 격차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고, 또한 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실업자와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직업의 종사자들, 언제든 기술이나 다른 환경에 변화에 의해 자신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 가치를 잃고 밀려날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  
절대적인 생활환경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갈 기회는 늘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된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늘어나고 처지가 악화된다고 하는 현상의 현대적 모습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바마도 마르크스주의자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종북좌빨이라 부르지만..


데이터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의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추세에는 직관적으로 맞는 것 같다. 부자들은 여전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이 축적될수록 돈을 벌어들일 곳은 줄어든다. 성장 동력은 떨어지고, 불황은 점점 극복하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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