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출판사
동녘사이언스 구)소소(도) | 2009-07-1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블랙 스완』, 인간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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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동녘 사이언스. 2007년 저작. 

블랙스완은 꽤 두꺼운 책이고 이것저것 인용되는 이론들도 많지만, 
그 결론은 단순하고, 어쩌면 상식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재미있을 때도 있고 영감을 줄 때도 있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이 책의 결론은, 결국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불가능성의 문제를 확률의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100번 정도 동전을 던진다면 50번은 앞면일 것이다. 
정확하게 50번이 아니더라도 앞면이 40번 이하 나오거나 60번 이상 나올 확률은 매우 적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할 때 항상 붙는 신뢰도 95% 범위에서 3.5% 오차라느니 하는 말들은 이런 전제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탈레브는 진정한 불확실성이란 그 확률조차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라고 말한다. 
예측하지 못한 것의 출현, 그것이 블랙스완, 즉 검은 백조이다. 
검은 백조는 비일상적이지만 한 번 나타나면 막대한 파급효과를 갖는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에서 수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폭락 장세가 나타나면, 수십년 간 누적된 이익이 며칠 사이에 사라진다. 

전문가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을 동원한 이론으로 그런 변동의 확률들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아무리 정교한 수학을 동원했다고 해도 전제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규분포이다. 
많은 학자들은 사건들의 발생이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가정하고 확률을 예측한다. 
그렇지만 정규분포가 통하는 세상에서는 블랙스완이 나타날 확률이 거의 없지만, 현실에서 블랙스완은 그보다 더 자주 출몰한다. 
정규분포는 동전을 한 번 던지는 일이 다음 번 동전을 던지는 일과 관계가 없다고 가정하지만, 현실에서 각 사건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경제학은 어떤 자산의 현금가치가 실제가치 주변에서 작은 폭으로 변동할 것을 예상하지만, 
현실적인 금융시장에선 아무도 자산의 실제가치를 측정할 수도 없고 현금가치가 실제가치보다 높은지 낮은지도 알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수많은 주식거래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확률분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데이터에서 어떤 모형을 만들어보았자, 그것은 미래를 예측 못한다. 
지난 수십년간 블랙스완이 없었다는 것이 다음날 블랙스완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비판적이었다. 
어떤 학자는 정규분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정규분포는 여러 예측 모형 중 하나일 뿐이고, 보다 정교하고 다양한 수학 모델들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가 반론했듯이, 블랙스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측이 형편없으니 더 제대로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블랙스완의 의미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실행하라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자신 있는 주장을 비판하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에 반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는 적다. 
한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투자를 할 때는 자산을 둘로 나누어 대부분은 아주 보수적으로 투자하고 일부는 아주 모험적으로 투자하라는 것. 
어중간하게 중위험 중이득으로 갔다가는 과소평가했던 위험 때문에 크게 손실을 볼 수 있다. 
그럴 바에는 대부분은 미국 국채 같은 안전한 데 투자하고 감수할 수 있는 손실 범위 내에서 일확천금을 노려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부정적 블랙스완과 반대되는 긍정적 블랙스완이 나타나 생각지도 못한 큰 보수를 갖다 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문가는 둘째 치고 나 스스로의 예측 능력을 과신하면 안되겠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특히 항상 일어나는 일은 낙관적인 내 예상보다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들어가는 시간을 예상하면, 항상 그 시간을 초과해서 일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라는 것이 의사결정의 제1원칙이 되었다. 
그 최악의 경우가 감수할 만한 것이라면, 그런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결정을 해도 괜찮다. 
하지만 감수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요행을 바라면서 결정을 해선 안된다. 
요컨데, 최악을 예상하고서, 감수할 각오를 하던가, 아니면 아예 그런 결과를 회피하거나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원칙을 세워두는 건, 의사결정의 질 뿐 아니라 결정의 어려움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어서 유용하다. 

그리고, 전문가에 대한 비판도 눈여겨볼 만 하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는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가 쉽다. 그런 분야에는 진짜 전문가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가축감별사, 천문학자, 토양감정사, 체스선수, 회계사, 사진판독사 등이다. 
그렇지만 어떤 분야의 전문가는 객관적인 검증이 힘들다. 
탈레브는 그런 분야의 예로 주식중개인, 임상심리학자, 정신과의사, 판사, 인력선발 담당자, 상담사, 정보분석가, 경제학자, 금융예측전문가, 금융학교수, 정치학자, 위험전문가, 개인금융상담사, CEO 등을 든다. 
전자의 전문가들은 틀린 예측을 하는 경우 변명할 수단이 적지만, 후자의 전문가들은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힘들다. 
결과가 좋아도 그것이 운인지 실력인지 판별하기가 힘들고, 예측이 틀려도 예측이 틀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댈 수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객관적인 척도보다 평판, 권위, 상호 평가 등으로 인정받는데, 이런 기준들은 자가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즉, 평판이 높은 사람은 전문가로 인정받기가 쉽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면 평판이 높아진다. 
전문가들의 예측력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전문가들의 예측력은 일반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거나 심지어 더 못한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연구는 꽤 흥미롭다. 
그리고, 이건 내 오랜 궁금한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 만큼 전문가에 의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전문가들이 충분히 믿을 만하지 않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탈레브는 운이 좋았다. 
이 책이 출판된지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저그런 레바논 출신의 월스트리트 증권분석가였던 저자는 회당 6만달러의 비용을 받고 강연회에 초대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블룸버그가 선정한 세계 금융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 50인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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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이라는 책의 저자는 평범의 왕국과 비범의 왕국을 구분한다. 

평범의 왕국에서 성과는 노력에 비례한다. 
사람마다 재능에 편차는 있지만 노력을 비슷하게 하는데 재능만으로 몇 배의 성과 차이가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과의 편차는 사람마다 재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종 모양의 정규분포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비범의 왕국에서는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해리 포터의 작가가 한 권의 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수만명의 무명작가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가수, 운동선수, 투자분석가, 발명가 등의 직업은 비범의 왕국에 속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 왕국에서는 성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몇만배 더 많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노력을 하거나 더 적은 노력을 하고도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일이 생긴다. 

작가나 연예인의 경우는, 만들어낸 결과물이 쉽게 복제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수가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데 들어가는 노력은 비슷하지만, 그 노래를 수만명이 함께 듣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몇 사람만 듣게 될 수도 있다. 
똑같이 피나는 연습을 하더라도 운과 재능에 따라 결과는 수십만배의 차이가 난다. 
투자분석가나 CEO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남들의 노력이나 자산에 자신의 재능을 더하여 성과에 차이를 가져 온다. 
그들에게 실력과 재능이 있다면, 혹은 그렇다는 명성이 있다면 그들은 수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자원에 비례하여 자기 몫을 챙긴다.
한편, 스타 야구선수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20% 정도 더 자주 안타를 때릴 수 있다는 이유로 몇천배의 연봉을 받는다. 
그들의 성과는 노력의 직접적 산출물이 가져다 주는 효용보다 경쟁자보다 더 나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1%라도 더 나아서 항상 이길 수 있다면 그들은 거의 모든 가치를 차지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비범의 왕국이 더 우세해지는 것 같다. 
남사당패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정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은 TV 등을 통해 무수한 대중에게 자신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연예산업은 승자독식의 경향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지식도 늘어난다. 
성과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자본이든 재능이든 가진 것에 의해 성과가 좌우되는 비율이 커지고 있다. 
로봇과 컴퓨터의 시대에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의 가치는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 하락, 노력에 의해 성과가 영향받는 비중의 감소는 소득의 편차를 계속 확대시킬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너무 빨랐다. 
그는 생산력의 고도화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자동화, 노동가치의 하락, 실업의 만연, 만성적 불경기, 소득불균등의 심화, 자본의 집중이다. 
이런 현상들이 대기업의 투자 활성화로 일자리를 늘린다는 처방으로 해결이 될까? 
대기업의 투자는 대기업의 자본집중을 심화시킬 뿐이다. 
일자리는 단기적으로 늘어나겠지만 임금은 더 줄어들 것이고 경기는 다시 나빠질 것이고 실업은 다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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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스타는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갖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하여 소수만 살아 남는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다. 
K팝스타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받는 모순된 요구들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대응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공감, 연민, 경탄과 같은 여러 감정을 이끌어낸다.  

참가자들이 처하는 딜레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가능성이 희박한 꿈을 추구할 것인지, 꿈을 추구하는 자원을 아껴 보다 현실적인 목표에 투자할 것인지,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에 충실할 것인지, 멘토들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교정할 것인지, 
그 순간의 주관적 감정에 몰입할 것인지, 연습한 기교를 발휘하는 데 힘쓸 것인지.

어린 친구들이 자신의 불확실한 재능을 선보이고 평가를 받으며 발전하거나 좌절당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 중 탑10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10명일 뿐이고, 설령 그 안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저 예쁘고 재기발랄한 이들 중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할 것이고 나머지 이들은 꿈을 접거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불안하고 고달픈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곳은 윈윈이란 있을 수 없는 제한된 세계이다. 

그렇게 한계지어진 세계 안에서 참가자와 심사자들은 윈윈을 만들어내기 위해, 혹은 윈윈의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많이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무명을 벗어나 적게나마 얻은 인지도로 음악 경력을 쌓아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명확하게 지적해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지 않도록 선을 그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k팝스타는 끊임없이 경쟁의 현실을 환기시키면서, 경쟁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이 프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들 중 하나는 당락을 겨루는 경쟁의 무대에서 경쟁자의 공연에 감탄하고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참가자들의 표정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유불리를 넘어서 훌륭한 것에 경탄하고 즐거워 할 만한 것을 즐거워한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물러나야 하는 운명이지만, 그들은 매 단계마다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이 어린 사람들은 대부분 비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패배가 운명지워진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 경험들이 그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모두들 행복하기를.

삼시세끼의 세계는 k팝스타가 셋팅되어 있는 엄격한 룰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나영석 PD는 출연자를 골탕먹이기 위해 제한을 가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셋팅하고자 하는 룰은 냉정하지도 않고 엄격하지도 않으며 공정하지도 않고 그다지 존중받지도 못한다. 
이곳에는 경쟁도 없고, 미션이 있긴 하지만 이루지 못한다고 큰일 날 미션들도 아니다. 

삼시세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삼시세끼일 뿐이다. 
출연자들은 무언가를 이루어내거나 발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삼시세끼를 때우기 위해 노력한다. 
k팝스타가 관문을 통과해나가는 직선이라면, 삼시세끼는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순환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에도 미덕은 있다. 
어차피 음식을 준비할 바에는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 낫다. 
설겆이를 하더라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좋고, 손님들을 재울 바에는 아궁이 앞에서 고생하더라도 따뜻하게 불을 때는 것이 좋다. 
어수선하게 시작한 살림에 김장김치도 갖춰지고 염소 우리 앞에 문짝도 달리고 사귀는 이웃도 생긴다. 
치열함은 없지만 노력과 궁리는 있고, 흥분과 도파민은 없지만 담백함과 섬세함이 존재한다.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을 배려한다. 

나는 치열한 경쟁의 세계와 자족과 여유의 세계, 둘 다에서 매력을 느낀다.  
그렇지만, 후자가 본바탕을 이루고 전자가 그에 얹혀지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자의 세계가 더 지속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는 본말이 뒤바뀌어 전자가 기본을 이루고 후자는 일탈과 예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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