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지브리스튜디오전시회를 둘러보는데는 세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레이아웃이라고, 콘티의 다음 단계, 실제 촬영화면의 기초가 되는 그림들이었다. 
라푸타, 센과 치히로, 원령공주 같은 작품들의 뼈대를 이루는 명장면들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끝으로 그려져 있는 걸 보면서 천재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장면을 상상해서 이렇게 표현해 낼 수가 있을까? 
독특한 감성이 담긴 풍경과 인물들 뿐 아니라 소품 하나하나에 담긴 디테일한 아이디어와 정성들.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 속에 잘 보이지도 않을 부분들까지. 
예를 들면, 마녀 키키가 으쓱한 표정으로 날아가는 배경을 이루는 건물들은, 장대한 크기의 레이아웃 속에서 건물 하나하나 한층한층마다 독특하게 디자인되어 가상의 도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예로, 센의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장면의 레이아웃엔 가판에 놓인 음식들에 대한 묘사가 접시마다 적혀 있다. 
미야자키하야오는 초창기엔 일주일을 납기로 알프스소녀 하이디, 엄마찾아삼만리, 빨간머리앤 같은 tv용 만화영화를 위해 300장씩의 레이아웃을 혼자 도맡아 그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미 천재였지만 그 노고의 밑바탕 위에 이후의 대작들이 나온 것이리라. 
말콤이 말한 아웃라이어의 한 예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 300장 중 한 장도 그럴 듯하게 그려낼 수가 없다. 이 분야는 내가 거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해서 스스로가 마치 훌륭한 연설을 보고 있는 선천적 벙어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천공의 성 라퓨타다. 
이 작품은 빼고 더할 것이 없어 보이게 간결하고 풍성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타, 아침의 나팔 소리, 철로 추격전, 전설, 불바다 속의 로봇, 구름 속의 라퓨타, 행글라이더로 착륙한 곳에서 보는 성의 모습, 새 둥지를 머리에 인 로봇, 하늘로 올라가는 라푸타의 성... 
한 장의 인상적인 레이아웃은 내 관점으로는 수십억 원 가격의 명화보다 더 풍부한 아이디어와 감성을 담고 있는데, 그런 레이아웃이 수십 장면이고 거기에 못지 않게 훌륭한 스토리와 액션과 캐릭터와 음악까지 더해졌으니, 이런 걸 기획하고 감독한 사람을 천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부연으로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항공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아버지에게서 많이 배웠는데 아들은 미야자키에게서 많이 배우지 못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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