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1618-1648)

저자
C. V. 웨지우드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1-06-1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인류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최초의 영토 전쟁 '30년 전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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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지우드라는 역사가의 '30년전쟁'을 읽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열국지, 왕좌의 게임 처럼 여러 세력이 서로 대결하고 연합하고, 외부와 대항하는 한편으로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나는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30년전쟁은 서양의 삼국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618년부터 1638년까지 정확하게 30년간 진행된 전쟁.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이렇다. 

1. 보헤미아(현재는 체코 지방) 사람들이 카톨릭 신도인 신임 황제가 보헤미아 왕을 겸하여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에 반대하여 퇴위시키기로 결정하고 대신 팔츠의 대귀족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선출한다. 갓 제위에 오른 페르디난트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으로, 카톨릭 신앙을 자신의 신민들에게 강요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2. 신교도였던 프리드리히는 왕위를 받아들여 보헤미아 지방으로 옮긴다. 

3. 이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여져 제국군이 보헤미아와 팔츠 지방을 공략한다. 황제의 명분에 저항하기 힘들었던 신교도 영주들까지 협력하는 상황 속에서 프리드리히는 전쟁에 패하고 망명한다. 보헤미아의 반란자들도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하고, 개신교들도 탄압을 당한다.

4. 황제에게 협력한 바이에른의 카톨릭 영주 막시밀리안이 황제를 도운 댓가로 팔츠를 합병하려 하자, 독일의 신교도 귀족들이 반발한다. 신교 보호의 명분 하에 영토 확대를 노린 덴마크 왕이 참전하나 제국군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패퇴한다. 이 무렵에 보헤미아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대귀족이 된 발렌슈타인이 막시밀리안을 견제하려는 황제의 지원을 받으며 활약한다. 

5. 황제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는 듯 했던 시점에 강해지는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고 북독일 지방에서 이익을 얻고자 스웨덴이 참전한다. 신교 보호의 명분 아래 작센 등 독일의 신교도 세력이 연합하여 제국군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 처음으로 우세를 점한다. 스웨덴 왕 구스타프는 30년전쟁의 영웅이 된다. 

6. 스웨덴과 신교 세력은 황제의 수도까지 위협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발렌슈타인이 남아 있었다. 스웨덴 참전 이전에 귀족들과 황제의 견제를 받아 해임된 상태였던 발렌슈타인은 절박한 처지에 몰린 황제의 탄원을 계속 거부하다, 마지막 순간에 군대를 모아 스웨덴 군과 전투를 벌인다. 스웨덴이 승리하지만 구스타프 왕은 전사한다. 

7. 발렌슈타인은 황제의 신뢰를 잃고 스웨덴 편에 넘어가려다가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스웨덴군과 신교 제후 연합군은 활동을 계속 하지만,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제국군에게 전투에서 패배 후 수세에 몰린다. 

8. 스페인과 독일 양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협공당할 것을 우려하던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잃은 스웨덴을 대신하여 잔존한 신교 세력과 연합하여 제국에 맞선다. 이 최후의 대결에서는 기울어져 가던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연합 세력에 대하여 프랑스와 스웨덴 및 신교도 영주들의 연합이 승리하여 이득을 취하고, 전 세력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어 영토와 종교 문제를 합의하고 전쟁이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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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압제자의 이미지와 신선한 스웨덴이나 우아한 프랑스의 이미지를 비교해 볼 때, 나는 신교도 세력을 편드는 편이다. 

하지만, 30년전쟁 역사책을 쓴 웨지우드의 관점에선, 황제의 승리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전쟁이 스웨덴 등 외국 세력의 참전으로 길어졌고, 독일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 인구의 1/3 이상이 줄었고,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커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뒤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비극은 대결하는 세력의 힘이 비등할 때, 그리고 대결에 참여하는 세력이 다양할 때 커진다. 

두 세력의 대결인 경우엔 결국 어느쪽으로든 기울어 승부가 빨리 결정되는 편이지만, 세력이 다양하면 약자들이 연합하여 강자에 대응하기 때문에 계속 판세가 바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다양성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유럽이 중국을 역전한 이유는, 중국만큼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세력이 서로 견제하는 와중에 이단과 혁신의 싹들이 짓밟히지 않고 숨쉴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지나친 분열은 서로 간의 투쟁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켜 발전의 여지가 남아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적당한 수준의 통합과 분열이 필요한 것인데, 개인의 입장에서 통합을 추구하거나 분열을 추구할 수는 있어도 적당한 수준의 통합이나 분열을 추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황제도, 왕도, 제후도, 용병대장도, 시장도, 상인도, 농민도, 각자의 이상과 목표와 이익을 위해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 역사는 그 힘들의 총합으로서 흘러가는 것이고, 그 흐름은 때에 따라 진보처럼 보이기도, 비극처럼 보이기도, 부조리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유럽인들은, 나름 정말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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