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스펜서블

저자
가우탐 무쿤다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14-05-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하버드대의 국가 리더십 강의 왜 어떤 리더는 위기 상황에서 대처...
가격비교

역사에 있어서 위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다. 
한 쪽에서는 역사란 위인들의 역사라고 본다. 
위인들의 특성과 업적들이 역사를 만들어간 힘이라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 위인은 시대가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역사는 기술의 발전을 비롯하여 여러 필연적인 힘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위인들은 그 힘의 표현일 뿐이다. 

많은 흥미로운 견해들이 그렇듯이 인디스펜서블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는 이 두 가지 관점의 결합이다. 
위인들은 때로는 시대의 산물이고, 때로는 자신의 개성을 통해 시대에 영향을 미친다. 
그건 경우에 따라 다르다. 
당연한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떤 위인은 시대의 산물이고 어떤 위인은 시대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흥미로운 관점이다. 
제퍼슨과 링컨은 모두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들이지만, 저자에 따르면 제퍼슨은 시대의 산물이고 링컨은 그렇지 않다. 
제퍼슨은 오랜 경력을 통해 동료들의 검증을 받고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후보였지만 여러 흔치않은 우연을 거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퍼슨은, 당시의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면 누구라도 따랐을 법한 방식으로 대통령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이다. 
링컨은, 그가 아니라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직무를 수행했다. 
그의 개성 때문에 남북전쟁의 향방과 미국의 역사가 달라졌다. 

인디스펜서블의 저자는, 역사 상의 지도자들을 동료 엘리트들의 검증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여과형 지도자와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대통령이 된 부통령 출신 대통령처럼 우연한 계기로 지도자가 된 비여과형 지도자로 구분한다. 
여과형 지도자는 당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될 법한 방식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평균적인 업적을 낸다. 
하지만 비여과형 지도자는 예상치 않았던 방식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고 그 결과는 아주 좋을 수도, 아주 나쁠 수도 있다. 
평상시에는 체임벌린 같은 무난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지만, 특별한 시기에는 처칠 같은 개성적인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와 개인, 구조와 주체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흥미로운 종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링컨, 제퍼슨, 우드로 윌슨, 처칠, 체임벌린과 같은 사례들이 중심이 되고 있어 역사책을 읽는 것에 가깝다. 
처칠이 수상에 취임하던 1940년 5월의 급박한 상황 전개는 드라마틱하다. 
핼리팍스가 수상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에 처칠이 수상이 되었다. 
처칠 대신 핼리팍스가 수상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나찌와의 협상을 시도했더라면, 그 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반응형


[정규재TV] 닥치고 진실

저자
정규재 지음
출판사
베가북스 | 2014-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방송 2년 만에 조회수 1,200만 돌파!‘진짜’에 목마른 지성...
가격비교

이 책의 저자인 정규재 씨는 한국경제신문의 주필이고 정규재TV라는 인터넷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보수 논객이다. 

정규재TV는 꽤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은 여러 시사적인 주제들에 대한 보수논객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은 김어준의 책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이유는 내가 평소 거부감을 느끼는 관점들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처럼 전문적인 학자도 아니고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읽기 즐거운 책이란, 70% 정도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또는 희미하게 인지하고 있던 생각들을 명료하게 표현해 주고, 
거기에 미처 생각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더 해 주는 책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성향의 책을 읽으며 그 논리와 근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즐겁지가 않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는 확인편향의 오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유리한 근거들을 수집하는 경향이 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믿음은 강해지고 근거도 늘어난다. 
하지만 어떤 믿음이 실제로 옳은지 그른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아니라 반증하려는 노력의 실패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책을 쓰기 위해 몽테뉴보다는 헤겔을, 하이에크보다는 사무엘슨을 더 많이 읽었다고 말한다. 
비슷한 사고방식의 사람들보다 그가 책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를 본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전문가들은 달라야 한다고 믿지만 과연 그런지는 의문스럽다. 

이 책에 나오는 주장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논리는 명쾌하고 근거들도 풍부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은 것은 노인세대의 자살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고 청년층 이하는 노르웨이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보다 자살율이 낮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율이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힘든 사회라는 근거로 인용되긴 하지만, 자살율만 놓고 본다면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살율 통계는 전체 사회가 힘들다기보다는 노인들의 처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때는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취업 걱정이 없었다면서 지금 청년들이 얼마나 힘든가 라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에는 대학졸업자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그밖에도,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문제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우파로 전향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었다. 
나는 좌파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자본주의사회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믿지 않으며 그 모순을 극복한 더 좋은 사회체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로의 전환은 어느 수준 이상의 생산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점이 100년 후일지 언제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경쟁이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보다 협업을 방해함으로써 발생시키는 비효율이 더 커지는 시점, 
인간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댓가 없이 활동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일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올라간 시점, 
시장에서 주고 받는 신호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효과적으로 집단의 합의를 도출하고 실행하는 방법이 발견되는 시점, 
그 때가 언제일까? 

만약 사회체제의 전면적 변화가 단기적으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규재와 마찬가지로, 나는 현 사회체제 내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좌파적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도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을 규제할 때 그 기업이 해외의 기업들과 지속적으로 경쟁해나갈 수 있을까? 
기술과 환경의 변화로 누군가는 대박을 챙기고 누군가는 가진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사회 속에서 갑을논쟁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논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우파도 신뢰하지 않는다. 
우선 그들은 주로 입신양명과 물질적 성공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두고 있다. 
이기적인 행동이 곧 전체 사회의 공리를 향상시킨다는 시장주의는 그들에게 최상의 복음일 것이다. 
그 주장에는 이론도 있고 논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를 보자. 
정규재는 환경 문제도 환경운동가들의 근거 없는 과장이라고 치부하는 듯 하다. 
하지만 환경 문제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외부효과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더러 잘못 대처할 경우 인류의 멸망까지 가져 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두 가지 대립되는 근거가 있어 하나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를 뒷받침한다면,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기업인이나 우파지식인은 후자를 중시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는 더 큰 위험이 있는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회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루는 시장의 힘을 견제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익의 추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미시적 최적화가 항상 거시적인 최선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시장은 이미 힘이 세다. 
그 힘은 견제받지 않으면 자기 편을 계속 늘려나갈 것이다. 

양쪽을 다 신뢰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미시적인 차원에서 공공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해나가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개별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정규재씨가 옳은지 아닌지를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반론을 함께 놓고 볼 수 없어서이다.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과의 비교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좌는 좌끼리만, 우는 우끼리만 이야기하고 상대편에는 낙인을 찍기에 바쁘다. 
우파는 종북이나 포풀리즘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좌파는 시장주의를 악으로 규정하고 감성적인 접근을 앞세운다. 
정규재 씨의 경우도 상대 진영에 대한 지나친 비하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서로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넓혀 나가야 한다. 
데이터와 근거로 서로의 오류를 수정하고, 좁혀질 수 없는 전제의 차이는 무엇인지, 좁혀갈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 논의의 과정은 투명하게 진행되어 억지가 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지성이 성숙되어지고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익혀가야 한다. 
시장의 논리를 현실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공공의 관점이 시장에 함몰되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가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좌파적 정파들은 (민주당이 여기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담론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지금은 좌파라는 정체성도 없고, 개별적인 문제에 산발적인 논쟁만 여기저기에서 벌어진다. 
담뱃값인상, 경제민주화법, 대기업규제, 중소기업지원, 이런 여러 문제들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다루어져야 하는 사안들이나, 어떤 정파에 존재 의미를 줄 정도로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문제들은 아니다. 
시장주의자의 논리와 근거들에는 설득력이 있으며, 미시적 차원에서의 정부의 관여는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큰 줄기를 잡는 것이 필요하다. 
증세와 복지의 확대, 교육에 있어서의 경쟁의 감소와 같은 문제들이다. 
국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해, 시장주의의 한계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무엇인지를 정립하고 주장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아마, 거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당의 경제정당화 움직임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반응형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이 말이 일종의 동어반복인 것처럼 여겨졌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생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좋은 상태이다. 

그런데 오늘 신문에서 리처드 셀이라고 하는 미국 왓튼스쿨 교수와 관련된 글을 읽었다.  
젊을 때 세계를 방황하다가 우리나라 송광사에까지 왔었다는 이 교수는 행복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순간적이고 긍정적인 감정, 노력과 희생이 따르는 장기 목표를 달성할 때 획득하는 결과, 
그리고 지혜로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 즉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영혼이 느끼는 경험이 그런 유형들이다. 

이런 구분은, 막연하게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지향점들을 제시해 준다. 
어떤 행복이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마다 자기가 추구하는 행복의 형태는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순간순간의 행복을 그 자체로서 향유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꾸준한 노력에 의한 성취와 발전을 더 중요시한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자면, 중용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것도 행복이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장애를 극복하는 것도 행복이다. 
어떤 행복은 소유와 향유를 통해 얻어지고 어떤 행복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에는 소소한 낙들과 진지하게 추구하는 목적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의지하기 적당한 유형의 행복은 셀 교수가 지혜로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감정은 통제하기가 어렵고, 노력과 희생을 한다고 해서 목표가 달성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좀더 지혜로와지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나 만족감에 연연해 하지 않고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그 나름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아마 스피노자가 추구했던 기쁨이 그런 종류가 아닐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불교도가 추구하는 것도 그런 행복이 아닐까? 

행복이라는 개념처럼 뭉뚱그려져 있던 개념을 나누어 보면, 생각을 더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행복과 성공, 직업선택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들도 있으니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