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왕좌의 게임 시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이미 첫 방송을 한 모양이지만, 저는 우리나라 케이블티비로 보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리뷰를 올릴 예정입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책의 진도를 추월해 버려서 리뷰가 예전보다 재미가 덜할 듯 하네요. 
(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단 말이야 하고 의문을 품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T)
결국 기대했던 6권은 올해도 출간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드라마 리뷰는 다음주부터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지난 시즌에서 소설과 드라마의 차이가 크게 났던 부분을 소개하려 합니다. 
대부분 지난 시즌 리뷰에 썼던 내용들이긴 한데요, 
원작에선 그랬구나, 정도로 가볍게 보시면 될 듯 합니다. 
물론 스포일러~~~~~~~~~~~~~~~~!!!!!!!!!!!!!!!! 입니다. 

1. 
드라마에서 제이미 라니스터는 브론과 짝이 되어 돈에서 벌이는 모험으로 분량을 채웁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애써 구출해 낸 미르셀라는 돈의 여자들(티리온의 챔피온이었던 오버린 공자의 애인과 서녀들)의 독으로 죽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드라마 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무나 죽이면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일단 소설에서는 미르셀라도 결국 죽게 될 거라는 복선은 많이 깔리지만 아직은 생존해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등장하지 않는 돈의 공녀(공작의 딸 정도 된다고 보고 공녀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영주의 지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이기도 합니다.)가 미르셀라를 여왕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아버지에게 제지당합니다. 
드라마에서는 미르셀라를 죽여 복수도 하고 전쟁도 일으키려 했던 것인데 소설에서는 목적은 같아도 수단은 달랐죠. 
피가 뜨겁고 자유분방하긴 해도 복수랍시고 무고한 소녀를 해칠 인물은 아니고 스스로도 아직 소녀일 뿐입니다. 
어쨌든 돈의 영주 입장에서 딸의 행동은 돈에 이길 가망이 없는 전쟁을 가져오는 위험천만한 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의 영주가 가문의 복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두어 둔 딸을 방문하여 둘만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목적이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 
다만, 그는 현실성이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고, 그 기회는 타르가리옌 가문의 후계자가 웨스테로스에 복귀할 때일 것입니다. 

2. 
소설에서 제이미 라니스터는 돈으로 아예 가지 않습니다. 
그는 킹스가드(근위기사)의 대장으로서 왕실의 군대를 지휘하여 리버룬의 잔존한 반란 세력들을 진압합니다. 
그는 캐틀린에게 풀려날 때 스타크 가문을 향해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킹스가드의 신분으로 타르가리옌의 마지막 왕을 죽였던 일 때문에 그를 명예를 잃은 기사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판을 감수하면서도 캐틀린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무력을 사용하는 대신 위협과 회유의 방법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킵니다. 
제이미 라니스터는 거칠지만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과 행동으로 최소의 희생으로 전쟁을 마무리해 갑니다. 
(캐틀린과의 약속은 자신과 이미 죽은 캐틀린, 그리고 브리엔느 정도만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노력은 꽤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 와중에 위기에 처한 세르세이로부터 구원해달라는 편지를 받지만 이제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제이미는 그 편지를 불태워버립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앞에 브리엔느가 나타납니다. 

3. 
소설에서 브리엔느는 산도르와 싸우는 일도 없고 아리아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산사도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추적의 과정에서 무법자 형제들에게 붙잡힙니다. 
이 무법자 형제들은 아리아가 잠시 붙잡혀 있던 그 일당입니다. 
이 무리는 아리아와 함께 할 때만 해도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면서 약자를 보호하는 로빈 훗 무리와 비슷한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고난과 희생을 겪은 끝에 더 난폭해지고 냉혹해졌습니다. 
이들을 이끌던 베릭 돈다리온은 자신이 갖고 있던 부활의 능력을 프레이 일당들에게 버려져 강물에 떠내려온 캐틀린의 시체에 전합니다. 
피부는 물에 상하고 목이 베어진 상처 때문에 성대를 다쳐 스스스 하는 소리 밖에는 내지 못하고 눈에는 복수심만이 가득한 끔찍한 몰골이 된 캐틀린이 이 일당의 지도자가 됩니다. 
한때 가까왔던 브리엔느조차 캐틀린에게는 원수인 라니스터 가문에게 붙은 배신자일 뿐입니다. 
제이미를 죽여 배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브리엔느는 거절하지만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에 포드릭을 구하기 위해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제이미 앞에 나타난 건 그런 처지를 겪은 브리엔느입니다. 
브리엔느는 산도르가 산사를 포로로 잡고 있으며 제이미가 혼자 자기를 찾아오지 않으면 산사를 죽이겠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 이후 제이미는 실종 상태입니다. 

4.
소설에서 리틀핑거와 산사는 윈터펠로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어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리틀핑거는 리사 사후 불안한 자기 위치를 굳히기 위해 애쓰고 있고, 산사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리틀핑거의 서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리틀핑거는 이어리의 상속권 순위가 꽤 높은 젊은 청년을 산사와 연결시켜 주려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 리틀핑거는 자신이 젊었을 때 사랑했던 캐틀린의 딸에게 성의를 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산사에게는 오랜만에 봄날이 찾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5. 
소설에서도 테온은 귀부인을 구해 성벽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산사가 아니라, 산사의 친구로 킹스랜딩에 동행했다가 에다드의 죽음 와중에 붙잡힌 소녀입니다. 
그녀는 티윈에 의해 실종된 아리아로 꾸며져 루제 볼튼에게 보내지고 램지 볼튼과 결혼합니다. 
볼튼 가문 입장에서는 이 결혼으로 윈터펠에 대한 권한을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녀도 램지에게 학대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6. 
소설에서는 스타니스가 전쟁에 패배하는 장면이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존에게 스타니스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램지 볼튼이 서명한 편지로 전달됩니다. 
존은 이 때문에 자발적 협조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진군하겠다고 발표하고, 이것이 그가 습격을 받는 원인이 됩니다.
(자발적 협조자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이것은 왕국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야경대의 전통을 깨는 일이고 그 존폐를 위협하는 일입니다. 야경대원들은 야경대를 위하여 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존을 찌릅니다.)
야인들을 받아들인 일은 갈등의 요소가 되긴 하지만 그것이 존이 습격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7.
스타니스는 윈터펠로 행군하면서 아내와 딸과 멜리산데르는 모두 캐슬블랙에 남겨 둡니다. 
가망이 높지 않은 전쟁에 가족들을 데리고 진군할 필요는 없겠지요. 
멜리산드레가 뒤에 남은 것은 스타니스의 전쟁보다 존을 도와 북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멜리산드레가 스타니스를 돕는 명분도 스타니스가 빛의 왕이 되어 백귀들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니까요. 
당연히 시린은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스타니스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부하 기사를 캐슬블랙으로 돌려보내면서 자신이 잘못 되면 시린을 후계자로 삼아 저항을 계속하라고 지시합니다. 
그 부하가 다보스는 아닙니다. 다보스는 소설 속에서 다른 외교적 업무 때문에 스타니스 진영을 떠나 있습니다. 
스타니스는 많이 불리한 상태이지만 한 가지 유리한 점은, 볼튼 쪽 사정도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스타크에 충성했던 북부의 여러 세력은 볼튼과 프레이 가문의 배신과 피의 결혼식에서 자기들도 당했던 희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윈터펠 성 안에서 프레이 가문과 다른 가문들은 서로 불신하고 있고 분위기는 흉흉합니다.  

8. 
소설에서 티리온은 아직 대너리스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라와 함께 융카이의 노예로 붙잡혀 있다가 융카이 휘하의 용병단으로 탈출하여 용병단이 편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중입니다. 
바리스는 킹스랜딩에 남아 티윈의 동생 케반을 암살하는 등 왕국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종합평 :
소설을 읽은 사람 관점에서 가장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스타니스가 딸을 화형시키는 장면과 미르셀라가 죽는 장면입니다. 
불필요한 잔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각색하는 사람의 고충을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이레의 복잡한 정치게임을 그리거나 제이미가 사령관으로 원정을 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은 드라마 상으로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존이 야인을 대상으로 포용정책을 펴다가 배신을 당한다는 것도 개연성이 있는 흐름인 듯 합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나 멋진 스토리를 잘 못 살렸다거나 왜곡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소설을 읽지 않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 관점에서 등장인물과 스토리에 개연성이 있고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면, 각색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소설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미답의 영역이라 기대가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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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그렇기 때문에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고, 가다듬은 소리와 자연스러운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를테면 장단상교를 길고 짧음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경우, 나로서는,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네가 나보다 키가 크더라도 넌 마이클 조던에 비하면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없어.
그래서 뭐? 그래도 너보다 큰 건 맞잖아. 

유무상생이나 난이상성. 그릇 안의 공간을 무라고 한다면, 그 무는 그릇이라고 하는 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쉬운 일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 모든 일이 똑같은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면 어려움이나 쉬움이라는 개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내 생각에, 노자는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음과 낮음이라는 개념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자가 부정하는 것은, 이 다른 것들 중의 한 쪽을 편들어 그것을 아름다움이나 선이라고 부르고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의 내용과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강하고 높은 것을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크고 강하고 높은 것들은 작고 약하고 낮은 것들과 어울려서 세상을 이룬다. 
우리는 크고 강한 것이 승리하리라 믿기 때문에, 또는 크고 강해지면 행복해지리라 믿기 때문에 크고 강한 것을 아름답고 선하게 여긴다. 
하지만 작고 약한 것이 승리할 수도 있으며, 크고 강해지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유무, 난이, 장단, 고하 등은 주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미와 선은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미와 선 같은 개념들도 확정지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의지에 따라 임의대로 규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변경할 여지를 갖고 있지만 자유로운 재량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데, 우리가 추하게 느껴지는 것이 실제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떤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아닌지는 사람마다도 다르고 한 사람에게라도 때와 상황, 우리가 품고 있는 여러 생각들, 기억들, 믿음들, 습관들에 의해 달라진다. 
특히 어떤 것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내어 갖고 있는 개념들, 관점들에 영향받는 바가 크다. 

사람들은 보통 높은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고 그것을 얻는 데 최선을 다한다. 
노자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높은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낮은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높음과 낮음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아름다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어떤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추하게 느껴진다. 그런 것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규정짓고 그것을 얻는 데에 집착하는 것 대신, 무엇을 아름답다 추하다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울리며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노자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다음 구절과도 연결이 된다.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은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을 취하니, 
행하되 말을 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추구하고 실행하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하는 자는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가지 않는다. 

무위라는 말은 보통 얽매이지 않음 정도로 해석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이라고 표현을 해 보았다. 
아름다움과 선함을 위해 일을 하되,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을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이라고 구태여 일컫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굳이 음식을 아름다움이나 선이라고 가치화할 필요는 없다. 
음식을 가치화한다면,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비유는 좀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방식이 이 비유에 많이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지혜를 가진 성인이라면, 추구하는 일이 배고플 때 음식을 찾는 일처럼 자연스러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높은 것을 낮게 만들고 낮은 것을 높게 만들거나 더 낮게 만들면서도, 높은 것이 아름답지 않아 낮게 만들었다거나 낮은 것이 아름다와 더 낮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배고픔이 음식을 찾는 길로 사람을 이끌 듯, 우리의 본성과 의지가 우리를 도로 이끈다. 
성인이란, 풍부한 지혜로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니 그에 대해 말을 하거나, 당신도 나처럼 해 보라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이룬 일을 자랑하거나, 과거에 이룬 일에 머무르고 댓가를 기다리며 노력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다른 존재와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으며, 정직한 정치인이 이제까지 자신이 이룬 공로나 그에 따르는 명예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을 만한 지혜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성인의 모습을 지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아름답고 선한 대상을 추구하는 것 이전에,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들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사물들을 공평하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길을 멈추지 않고 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들로 이름지은 것 너머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그 길 위에서 종종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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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천하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일컬으면 이미 미운 것이다. 
모두가 선하다고 아는 것을 선하다고 일컬으면 이미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고,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은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을 취하니, 
행하되 말을 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추구하고 실행하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하는 자는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가지 않는다. 

해석이 쉽지 않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첫 문장만 해도 여러 해석이 있는 것 같다. 
첫 문장을,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아는 것은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만약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은 나한테는 와닿지 않는다. 

천하가 아름다운 것으로 아는 것이라도 나한테는 추하다, 또는 실제로는 추한 것이다, 이런 해석은 어떨까?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체험된다는 뜻일까?
즉 인식의 주관성과 상대성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겠지만, 그 함의를 잘 모르겠다. 
이 장은 계속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이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뒷부분까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비상명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해 보았다. 
즉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라도 그것에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위'라는 한자에는 행한다, 위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선 말한다는 뜻으로 보았고, 사오미는 이미 추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보았다. 
또는, '위'를 위한다는 뜻으로 보고, 천하가 다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숭상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뜻은 좀 다르지만 취지는 비슷해 보인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과 거리가 생기는 듯한 느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나는 널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듯한 느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떠한 것을 어떠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어떠함이 덜해지는 경우들이 있지 않은가. 
아마 감정이 충분히 차 올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큰 해가 없을 것이다. 
말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잘 쓰여진다면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무언가 가치있는 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면 순수성은 훼손되고 만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스스로 국가에 대한 강한 애국심을 표현할 때 그 애국심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건 타인 뿐만 아니다. 
만약 자기반성적인 사람이라면 자기가 표현하는 애국심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약간이라도 과장된 감정이 아닌 것인지 하는 일말의 의심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표현된 것과 표현 사이의 거리를 느끼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아름답다고 의식적인 가치 평가를 하는 순간, 그 평가된 가치는 검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명가명,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충분했을 상황에서 가치를 평가를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치 평가란 것은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대안들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멀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가란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가를 통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가리고, 가치 있는 것과 가치가 적은 것을 구분한다. 
우리가 개념화를 통해 대상을 추상화하고 세부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평가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평가를 당하는 대상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가치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있느냐의 관점으로만 보이게 된다. 

심지어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린 아이들한테 칭찬을 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고 한다. 
노력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아이에게 뿌듯한 기분을 주고 노력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칭찬은 기분을 좋게는 하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도하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자신이 칭찬받았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가 강조하는 도는 길이고 흘러감이고 걸어감이고 노력함이다.
이에 반해 명은 고정된 것, 변화하지 못하는 것,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일컫는 것은 어떤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고, 명으로 도를 재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명가명 비상명.
아름답다고 이름 붙여진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착한 일을 행하고자 노력하고, 명에 집착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결론적으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고 아름다움은 주관적, 상대적인 가치이다, 라는 류의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 그런 가치 평가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취지는 비슷하다. 
노자의 문장들에 세밀한 해석은 서로 달라도 대체적으로는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해도 나한테는 추한 것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은 가치를 평가하는 일 자체의 문제점은 별로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일 자체를 그만 두어야 한다, 라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여기에 내 절충주의적인 태도를 더하자면, 
앞서 유욕을 버리고 무욕만으로 살 수 없고 언어를 버리고 묘함을 보면서 살 수만도 없다고 했듯이, 가치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살기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와 목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듯이, 언제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가치를 평가하는 습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해석을 하면 2장의 첫부분은 1장의 연장선 상에서 논리를 이으면서 같은 장의 뒷부분으로도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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