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천하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일컬으면 이미 미운 것이다. 
모두가 선하다고 아는 것을 선하다고 일컬으면 이미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고,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사람은 일컬음 없이 일을 하는 방식을 취하니, 
행하되 말을 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머무르지 않고, 추구하고 실행하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하는 자는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가지 않는다. 

해석이 쉽지 않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미. 첫 문장만 해도 여러 해석이 있는 것 같다. 
첫 문장을,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아는 것은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만약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은 나한테는 와닿지 않는다. 

천하가 아름다운 것으로 아는 것이라도 나한테는 추하다, 또는 실제로는 추한 것이다, 이런 해석은 어떨까?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체험된다는 뜻일까?
즉 인식의 주관성과 상대성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겠지만, 그 함의를 잘 모르겠다. 
이 장은 계속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이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뒷부분까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비상명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해 보았다. 
즉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라도 그것에 아름답다고 하는 개념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위'라는 한자에는 행한다, 위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선 말한다는 뜻으로 보았고, 사오미는 이미 추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보았다. 
또는, '위'를 위한다는 뜻으로 보고, 천하가 다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숭상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뜻은 좀 다르지만 취지는 비슷해 보인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과 거리가 생기는 듯한 느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나는 널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듯한 느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떠한 것을 어떠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어떠함이 덜해지는 경우들이 있지 않은가. 
아마 감정이 충분히 차 올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큰 해가 없을 것이다. 
말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잘 쓰여진다면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무언가 가치있는 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면 순수성은 훼손되고 만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스스로 국가에 대한 강한 애국심을 표현할 때 그 애국심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건 타인 뿐만 아니다. 
만약 자기반성적인 사람이라면 자기가 표현하는 애국심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약간이라도 과장된 감정이 아닌 것인지 하는 일말의 의심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표현된 것과 표현 사이의 거리를 느끼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아름답다고 의식적인 가치 평가를 하는 순간, 그 평가된 가치는 검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도가도 비상도 명가도 명가명,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충분했을 상황에서 가치를 평가를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치 평가란 것은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대안들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멀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가란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가를 통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가리고, 가치 있는 것과 가치가 적은 것을 구분한다. 
우리가 개념화를 통해 대상을 추상화하고 세부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평가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평가를 당하는 대상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가치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있느냐의 관점으로만 보이게 된다. 

심지어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린 아이들한테 칭찬을 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고 한다. 
노력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아이에게 뿌듯한 기분을 주고 노력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칭찬은 기분을 좋게는 하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도하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자신이 칭찬받았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가 강조하는 도는 길이고 흘러감이고 걸어감이고 노력함이다.
이에 반해 명은 고정된 것, 변화하지 못하는 것,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일컫는 것은 어떤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고, 명으로 도를 재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명가명 비상명.
아름답다고 이름 붙여진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착한 일을 행하고자 노력하고, 명에 집착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결론적으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고 아름다움은 주관적, 상대적인 가치이다, 라는 류의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 그런 가치 평가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취지는 비슷하다. 
노자의 문장들에 세밀한 해석은 서로 달라도 대체적으로는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해도 나한테는 추한 것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은 가치를 평가하는 일 자체의 문제점은 별로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일 자체를 그만 두어야 한다, 라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여기에 내 절충주의적인 태도를 더하자면, 
앞서 유욕을 버리고 무욕만으로 살 수 없고 언어를 버리고 묘함을 보면서 살 수만도 없다고 했듯이, 가치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살기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와 목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듯이, 언제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가치를 평가하는 습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해석을 하면 2장의 첫부분은 1장의 연장선 상에서 논리를 이으면서 같은 장의 뒷부분으로도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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