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가치관은, 목적에 가치를 둔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수단에도 가치가 부여된다. 

구체적인 목적과 수단은 다르지만 많은 철학이 이런 방식이고, 일상적 삶도 이런 방식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궁극의 목적이고, 행복에 도움이 되는 여러 수단들을 탐구하는 것을 윤리학의 주제로 삼고 있다. 

기독교인에게 궁극의 목적은 구원과 천국이고, 공리주의자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 효용이며,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역사의 전진이다.  

철학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때때로 생각하기도 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무엇인가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열심이다. 

궁극의 목적, 이를테면 행복이나 최대의 효용과 같은 가치가 있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어떤 중간목표가 있고, 그 중간목표에 도움이 되는 어떤 수단이 있다. 

그런 식으로 목적과 수단들이 궁극의 목적을 최상위에 두는 피라미드를 이룬다. 

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를 이성적으로 흠잡을 수 없는 체계로 만드는 데 힘쓰고, 일반 사람들은 좀 불명료한 대로 직관과 논리와 여러 가지를 동원해 얼기설기 보수를 해 가는 어설픈 개똥철학에 의존하여 삶을 이끌어나간다.

완성도가 어떻든 우리는 계층화된 가치 체계에 의존하여 삶을 꾸려나가고, 우리의 머리 속에는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최대한의 가치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에 평가를 내린다. 


이런 목적 중심의 가치관은 인간이 가진 지적 본성에 어울린다. 

인간의 지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해 온 것이다. 

목적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수단을 찾고, 목적을 기준으로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 지능의 주요한 역할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을 벗어나 뭔가 의도적인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는 목적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더군다나 이런 목적지향적 성향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더 강해진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협업의 규모와 비중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런 목적이 있어야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고, 기여도가 평가되고,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전통과 관습이 힘을 잃고 변화가 당연시되고 수많은 대안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합리적 사고는 더 지배적이 된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우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지금 영위하고 있는 일과 삶의 방식은 항상 더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질문의 대상이 된다. 

선택을 하거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적을 정의하고 대안들을 평가해야 한다. 


이런 것은 피할 수도 없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목적을 정의하고 수단을 찾고 대안을 평가하며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일들을 그만 두면 특별하게 이루는 일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혹자는 노자의 무위를 이렇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무위가 꼭 그런 의미여야 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우리가 합리를 추구하는 일을 피할 수 없더라도, 합리만으로 가득한 삶은 균형을 잃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기껏 얻어낸 것에서도 순수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언제나 더 나은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항상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대상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에만 신경을 쓰느라 대상의 많은 부분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하고 불완전한 평가에 왜곡된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어떤 대안을 이야기하는가?

노자는 우리 삶의 가치가 특정의 목적을 달성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찾아 낸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갈 수가 있다면, 그 결과와 관계 없이 충분한 것이고, 그 자체가 가치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에 따라, 가야 할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 

만약, 그런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움과 자존감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숙명, 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고 확신할 수가 있는가? 

우리가 내린 결정들이 옳았는지, 더 나은 최선이 없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자꾸 목적 중심의 사고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다시금 도의 효용, 다른 목적이나 기준에 비추어서 도의 가치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습관은 우리에게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우리는 항상 무엇이든 그 효용을 묻고 그에 따라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노자에게 있어서 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필연이고 그 자체가 가치이다. 


하지만, 도를 따라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떤 길이든 다 도이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가든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도를 따른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이 어려운 점이다. 모두가 도일텐데, 어떤 도를 다른 도와 차별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길을 찾는다. 

내 온 존재를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가는 길을 나의 숙명과 일치시켜 나가고자 노력한다. 

내 온 존재라고 하는 것 안에는 내가 가진 목적, 습관, 믿음, 무의식, 욕구, 추론, 직관이 모두 포함이 된다. 

나는 길을 찾고 길을 걸으며 그 과정에서 내 존재가 변화해 나가고, 그렇게 변화된 내가 다시 길을 찾아 걷는다. 

그렇게 길을 찾아 걷는 것이,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역할이자 의무의 전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번민, 불만, 갈등, 망설임, 의혹 따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나의 역할을 다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충분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결정이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노자가 이야기해 줄 수 없는 나의 목적과 믿음과 욕구가 무엇인지 되돌아 보고 불확실성 앞에서 갈등을 해야 한다. 

노자가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최선을 다했다 다하지 못했다는 인식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집중하고 노력했다고 스스로를 정직하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그러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지,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당신의 온 존재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이 당신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동안 걸어가면 된다. 


사고의 관점을 조금 바꾸어 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목적이나 결과, 가치에 집착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지를 인식한다면, 길을 만들면서 걸어가는 도인의 이미지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활에서 분명히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울리는 BGM(배경음)을 바꾸는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와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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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글을 앞에서 인용했지만, 그의 글 중에는 노자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알랭 드 보통의 지론 중 하나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지만 이성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실천하고, 그 결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라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세우고 만든 목적과 계획, 지식과 믿음에 영향을 받는 것 못지 않게 주변의 환경, 몸의 상태, 습관, 무의식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진리를 전하여 한 번 믿게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식과 설교와 기도 등을 통해 진리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고 마음에 배어들게 하는 데 힘쓴다.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의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멀어졌던 과거의 깨달음을 다시 느끼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된 진리에 대한 이해와 납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인간의 전존재를 통해 반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기존에 진리라고 배운 것들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명한 진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두고 검토하여 새로운 진리의 체계를 쌓아올리고자 했다. 

다만 그러한 체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상식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로 했다. 

그의 삶은 어딘가 구경꾼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도 강하게 연루되지 않고 자신의 경험들을 철학을 위한 관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시도는 용감한 것이었고 가치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노자의 접근 방식은 좀 다르다. 

언어로 표현된 어떤 진리를 표현하고 증명하였다고 해서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진리에 따라 살겠다는 결심과 의지만으로 도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달은 이후에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깨닫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도를 따라 하늘을 운행하듯, 인간의 몸과 정신, 자아와 세계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길을 만들고 그 길에 따라 걸어간다. 

깨달음이란 그런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마음의 상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 위에 있을 때의, 또한 도 위에 있도록 하는 마음의 상태가 깨달음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더 많은 사실과 지식을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더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길을 벗어나지 않고 운행하는 법을 배우듯, 우리는 길을 가면서 길을 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도에 대한 깨달음, 또는 도와 합치되는 상태가 일종의 마음의 상태라면,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수양, 즉 지속적인 실천과 노력이 필요하다. 


통상적인 가치체계에서 가치의 흐름은 욕구에서 목적이 생기고, 목적에서 수단이 나오고, 수단으로서 진리가 탐구되고 활용된다.

즉. 진리를 알기 위한 노력은 궁극적인 가치인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노자의 가치체계에서는 도에 대한 깨달음과 도를 따르는 것은 서로 구분할 수가 없고, 도를 따르는 것, 그 길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즉 수양 그 자체가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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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1장에 무욕이관기묘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무욕은 욕심이 없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사과를 그리는 화가처럼 몇 가지 예를 들긴 했지만, 아래 글을 읽어 보니 역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는 비슷한 생각이라도 훨씬 재미있게 표현하는구나 싶다.

노자에 관련해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글인데 원문에는 알랭 드 보통의 글 뿐 아니라 노자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도 담겨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보시기 바란다. 

원본 링크 : https://www.facebook.com/faustcollege/posts/5716706928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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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언어는 그 지속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권태,짜증,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어떤 사건이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사건은 추상화된 의미와 저자의 의도라는 미명하에 그 다양성을 상실한다.

클로이와 나는 상당 기간에 걸쳐서 사랑했고 그 시간 동안 나의 감정은 감정적인 계단을 워낙 광범위하게 가로질렀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고 단순화에 대한 욕구가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략에 의해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했다는 말은 그 사건들을 잔인하게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함께 보낸 주말을 단 한 단어 "유쾌했다'는 말로 기억할 수 있고 질서와 정체성을 만들어냈으니,언어가 위선임을 용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끔은 말 밑의 흐름,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강 밑에 흐르는 물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얼마나 쉽게 들리는가?

마치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거나 프루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더 복잡했던가?

한 가지를 말하면 곧 다른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모든 주장은 수많은 반박을 억압했다는 상징이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고,이성에는 시간으로 제한된 범위가 없기 때문이고,유통기한이 없기 때문이다.

배신의 전형적인 시나리오에서 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묻는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X에게 빠져서 나를 버릴 수 있니?" 그러나 시간을 고려한다면 배신과 사랑 사이엔 모순이 없다.

(중략)

클로이의 생일 카드를 쓰는 과정에서 갑자기 내 펜은 종이 위에 정지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그럼에도 그 핵심은 어쩐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너무 의미가 깊어서 아직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고백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어려움과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통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도 그 말들이 서로 다른 원천에 뿌리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 책들이 서로 다른 대목에서 감동을 주었으며,결국 우리 각각에게 다른 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 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내 마음 → ㅅ ㅏ ㄹ ㅏ ㅇ → 그녀의 마음

클로이와의 저녁 식사에서 나는 나의 클로이에 대한 마음을 'ㅅ ㅏ ㄹ ㅏ ㅇ'이라는 수송 수단에 태워 보내려 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서 나는 우연히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선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남용되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보다 그 말이 나의 마음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부터 나와 클로이와의 사랑은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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