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우가 설치된 노트북에게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랭 드 보통의 종교관 (0) | 2015.02.01 |
---|---|
의미에 대한 잡상 (4) | 2014.01.26 |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 (10) | 2013.05.19 |
윈도우가 설치된 노트북에게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의 종교관 (0) | 2015.02.01 |
---|---|
의미에 대한 잡상 (4) | 2014.01.26 |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 (10) | 2013.05.19 |
며칠 심하게 아팠다. 몸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도 바닥까지 내려 앉았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은, 지금 이런 것은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며, 몸이 나아지면 사태가 좀 나아질 거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더 나이를 먹을수록 몸 상태가 만성적으로 좋지 않을텐데, 그때는 어떠할까?
그건 그때의 문제이고, 아무튼 나는 한숨을 돌려가는 상태이다.
신이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닐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란 개념 자체가 모순인 것 같다.
즉,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한 존재라는 것도 말의 오용이다.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은 뻔한 의문이지만,
그보다는 덜 뻔하지만 역시 신선함이 덜해져 가는 의문은,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는 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질병도 가난도 실업도 불경기도 전쟁도 없어지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도 없이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천생연분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수백년 씩 살다가, 이제 충분히 살만큼 살았다, 싶을 때 스탠드의 불을 끄고 잠이 들듯이, 죽게 된다면. 그런 세상은 정말 훌륭한 세상이긴 하지만, 그런 세상이라고 해서 어떤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다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대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고 해서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난 궁극적인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난 왜 당장 존재를 그치지 않는가?
그건 나는 궁극의 의미와 삶을 계속 진행해 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동법칙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는 행성도 없고, 자살하는 동물도 (아마도) 없다.
궁극의 의미 같은 문제에 대한 생각으로 삶이 영향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과 본분을 과대 평가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본분이니 하는 말도 모순이 아니냐, 어떤 일이든 가능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여러 가지 대답들을 자랑스러운 어조로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 아니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으며, 그 경향들을 의미라고 하는 개념의 매개로 묶어 추구하는 것 역시 그런 경향 중의 하나이다. 만약, 철학을 연구하다가 허무주의에 빠져 도박에 중독되었다가 노숙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여러 경향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결과이지만, 아마 그런 결과는 의지나 생각의 간섭으로 약간의 조정을 가해 피할 수도 있는 결과였을 것이고 그것을 운명이라거나 철학적 귀결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적 견지에서 당신의 삶이 어느 누구의 삶보다 못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구의 삶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도 없을 것이고, 어쨌든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주어진 사고력이 이상하게 (잘못되게 라고는 할 수 없어도) 펼쳐져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뭐랄까,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수수께끼 같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미란 없다. 그렇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이건 정도의 문제인 것일까?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지만, 철학자처럼 궁극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사회가 정해 주는 의미 체계, 흔한 말로 돈과 명예와 가족과 사랑 등의 가치 기준을 따라 가거나,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전통, 또는 행복한 삶의 전범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미보다는 방법에 대부분의 고민을 할애한다. 부와 명예가 좋은 것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다만 부와 명예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삶의 모습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 또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행복의 명백한 조건들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아마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지적인 철학자들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으며, 내가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내 삶의 행복과 선택의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픈 도중에, 행복에 대해 갖고 있던 여러 믿음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여러 가지,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여러 가지가 몸이 아픈 동안에는 다 변변하지 않거나 혐오감을 일으켰다.
이것이 종교가 없는 사람의 약점이다. 의미를 잠정적인 도구 정도로 여기다가는, 주관적인 감정이 평소의 믿음과 어긋나는 쪽으로 움직일 때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상황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 뿐이었다.
몸은 이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나, 믿음직스럽지는 않다.
건강한 몸, 친구, 일.
라만차의 기사 노래 가사처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나가기 위해서는 붙잡을 것들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의 종교관 (0) | 2015.02.01 |
---|---|
노트북에게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2) | 2014.02.09 |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 (10) | 2013.05.19 |
첫째로는 건강.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당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의 눈에도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비쳐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사람이 한둘 곁에 있는 것.
책이나 음악처럼 쉽게 손댈 수 있고 물리지 않는 취미.
배고프지 않고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요즘의 일반적인 필수품들, 즉 휴대폰 같은 것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
육체적인 고통이나 지나친 스트레스나 권태나 격무 등으로 너무 많이 고통스럽지 않은 직업.
이 정도가 갖추어지면 대략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사회의 생산력은 이 정도를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위에서 열거한 조건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아도 저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경제적 수입을 갖추지 못했거나, 직장이 너무 스트레스이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적절한 취미를 갖추지 못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좋아 보여도 제대로 된 친구 한 사람이 없거나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여 정붙일 곳이 없는 사람들...
또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행복이란 기본적인 조건들의 충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더 많은 즐거움의 기회를 찾는 데 몰두하느라, 계획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후회하고 비교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데 시간과 마음을 뺏기느라, 집중해야 할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이론이 말해 주는 것처럼 새로운 욕구에 몰두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불만이 많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행복한 상태에서 추구를 계속하고 있을 뿐으로, 불행 속에서 절박하게 빠져나오려고 하는 자들의 추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들에서 시사점을 찾아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먼저, 행복에도 수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1부터 10000까지 가능한데, 어떤 사람은 9000레벨에 있고 어떤 사람은 100레벨에 있다, 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 것.
기본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마음을 제대로 다룬다면 당신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고,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도 불만족 속에서 추구를 계속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을 버릴 때, 당신은 움직임이 더 자연스러워지고 가벼워질 것이고, 아마도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이루는 여러 기본적인 조건들을 세심하게 가꿀 것. 모험을 할 때는 위험을 염두에 둘 것.
특히, 당신의 마음에 와 닿는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면, 성의를 다해 관계를 가꾸어나갈 것. 생각보다 그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함의를 찾는다면, 사회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의 총합을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지 말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알아서 잘 해 나갈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키우는 일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조건들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흔한 말로 요약하면,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다.
하지만 소득의 재분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경쟁의 완화, 공공서비스의 확대, 특히 문화 분야에 대한 지원, 근로시간의 단축, 자긍심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의 공급, 질병과 천재지변이나 경제의 불확실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전락할 수 있는 경우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보험의 확대, 지식보다 경험의 기회를 주는 데 중점을 두는 교육 등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행복의 기본 요건에 해당하고,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해 그런 여건들의 충족이 일반화될 수 있을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일들은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다른 가치들을 이에 종속시키는 관점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2) | 2015.03.28 |
---|---|
선함에 대하여 (1) | 2015.02.08 |
선택의 패러독스 : 선택하는 일이 힘든 사람들에게 (1) | 2013.06.09 |
불행하다는 것은 병에 걸린 것과 비슷하다. (1) | 2013.05.29 |
Don't Sweat The Small Stuff (Chapter 2) (1) | 2013.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