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심하게 아팠다. 몸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도 바닥까지 내려 앉았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은, 지금 이런 것은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며, 몸이 나아지면 사태가 좀 나아질 거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더 나이를 먹을수록 몸 상태가 만성적으로 좋지 않을텐데, 그때는 어떠할까? 

그건 그때의 문제이고, 아무튼 나는 한숨을 돌려가는 상태이다. 

신이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닐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란 개념 자체가 모순인 것 같다. 

즉,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한 존재라는 것도 말의 오용이다.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은 뻔한 의문이지만, 

그보다는 덜 뻔하지만 역시 신선함이 덜해져 가는 의문은,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는 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질병도 가난도 실업도 불경기도 전쟁도 없어지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도 없이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천생연분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수백년 씩 살다가, 이제 충분히 살만큼 살았다, 싶을 때 스탠드의 불을 끄고 잠이 들듯이, 죽게 된다면. 그런 세상은 정말 훌륭한 세상이긴 하지만, 그런 세상이라고 해서 어떤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다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대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고 해서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난 궁극적인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난 왜 당장 존재를 그치지 않는가? 

그건 나는 궁극의 의미와 삶을 계속 진행해 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동법칙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는 행성도 없고, 자살하는 동물도 (아마도) 없다. 

궁극의 의미 같은 문제에 대한 생각으로 삶이 영향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과 본분을 과대 평가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본분이니 하는 말도 모순이 아니냐, 어떤 일이든 가능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여러 가지 대답들을 자랑스러운 어조로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 아니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으며, 그 경향들을 의미라고 하는 개념의 매개로 묶어 추구하는 것 역시 그런 경향 중의 하나이다. 만약, 철학을 연구하다가 허무주의에 빠져 도박에 중독되었다가 노숙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여러 경향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결과이지만, 아마 그런 결과는 의지나 생각의 간섭으로 약간의 조정을 가해 피할 수도 있는 결과였을 것이고 그것을 운명이라거나 철학적 귀결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적 견지에서 당신의 삶이 어느 누구의 삶보다 못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구의 삶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도 없을 것이고, 어쨌든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주어진 사고력이 이상하게 (잘못되게 라고는 할 수 없어도) 펼쳐져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뭐랄까,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수수께끼 같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의미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미란 없다. 그렇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이건 정도의 문제인 것일까?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지만, 철학자처럼 궁극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사회가 정해 주는 의미 체계, 흔한 말로 돈과 명예와 가족과 사랑 등의 가치 기준을 따라 가거나,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전통, 또는 행복한 삶의 전범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미보다는 방법에 대부분의 고민을 할애한다. 부와 명예가 좋은 것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다만 부와 명예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삶의 모습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 또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행복의 명백한 조건들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아마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지적인 철학자들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으며, 내가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내 삶의 행복과 선택의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픈 도중에, 행복에 대해 갖고 있던 여러 믿음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여러 가지,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여러 가지가 몸이 아픈 동안에는 다 변변하지 않거나 혐오감을 일으켰다. 

이것이 종교가 없는 사람의 약점이다. 의미를 잠정적인 도구 정도로 여기다가는, 주관적인 감정이 평소의 믿음과 어긋나는 쪽으로 움직일 때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상황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 뿐이었다. 

몸은 이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나, 믿음직스럽지는 않다. 

건강한 몸, 친구, 일.

라만차의 기사 노래 가사처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나가기 위해서는 붙잡을 것들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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