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은 제가 소개하려는 책의 제목입니다. 리 매킨타이어란 분이 2021년 출간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드문 것 같은데 미국이나 브라질 같은 나라에는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입니다. 미국에선 2% 정도가 그렇게 믿고, 5% 정도의 현명한 사람들은 지구 모양에 대해 어느 이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평평한 지구론에 대한 유튜브 영상도 많고, 꽤 큰 규모의 행사도 열린다고 하네요.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행사에 참여해서 강연도 듣고 참석자들과 대화도 나눕니다. 저자는 그런 시도들을 통해 뭔가 교훈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을 과학부정론의 하나로 봅니다. 과학부정론이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탐색하면서 기후위기와 GMO를 구체적인 사례로 상세히 다룹니다. 저자는 기후위기에 대한 부정, 백신에 대한 배척, 진화론에 대한 거부, GMO 식품에 대한 회피 등을 평평한 지구론과 더불어 과학부정론의 대표적 사례들로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 신봉자들의 행사에 참여해서 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보려고 했던 것은, 과학적인 합의를 믿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방법에 대한 탐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로선 저자의 목적의식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표현했지만 저는 공론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공론이 꼭 과학부정론자와의 대화일 필요는 없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일은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을 믿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과학자들의 폭넓은 합의가 없는 분야에서 토론을 하는 경우엔, 서로가 상대방을 과학부정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과학부정론자와의 대화 뿐 아니라 더 넓은 주제들에 대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관해서도 시사점을 가질 것 같습니다. 
제가 책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출처 : https://www.ksakosmos.com/post/지구평면설-그들은-왜-지구가-평평하다고-믿는가
그러면 저자가 배운 점들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공통된 성향을 발견합니다.

  1.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들만 보려고 하는 체리피킹
  2. 자신들의 믿음을 부정하는 근거와 논리들이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음모론
  3. 그럴 듯한 권위와 말을 내세우는 가짜 전문가들에 대한 의존
  4. 비논리적인 논증
  5. 상대방에게 스스로 과학적임을 밝히기 위해 100% 진실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성향들을 시금석처럼 적용해서 상대방이 비이성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담배의 유해성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담배회사들의 로비 탓이  크다는 것과 기후위기부정론 역시 석유기업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거가 있는 음모론과 근거가 없는 음모론을 구분하지 않고 음모론이 비이성적인 주장의 징후라고 얘기하긴 어려운 셈입니다. 

하지만 저한테 가장 시사점이 있게 느껴진 것은 5번째 항목입니다. 즉, 과학부정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공격을 당할 때 그러는 너희는 100%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근거를 갖추고 있느냐고 역공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강력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과학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흔히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완벽히 증명하긴 어렵지만, 그것은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옳고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두 이론이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러면서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이야기되는 많은 근거들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찾아 공격한 다음, 이것 봐라, 진화론이 완벽한 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원인이 인류의 활동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변화인지, 그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등에 대해 확정하기 어렵다고 주장을 펼치면 더 그럴 듯하게 들리고 반박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사실, 어디까지가 과학부정론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인지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 중에 GMO, 즉 유전자변형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부분이 있다는 걸 보면, 기후위기나 평평한 지구론 같은 주제를 다룰 때와 다른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 주제는 저자가 과학부정론이 우파적 현상인지 고찰해 보고자 선정한 주제입니다. 기후위기에 대한 부정 등 과학부정론의 여러 주제들이 공화당 지지 성향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과연 진보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과학부정론은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다루어 본 것이죠. GMO의 경우 저자의 입장은 그 위험성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과학계의 합의라는 것이고, 반면 불충분한 근거로 GMO를 회피함으로 인해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작물을 기르지 못하게 되어 기아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등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갖고 저자는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오랜 과학자 친구와 대화를 나눕니다. 제가 보기엔 그 결과가 좀 애매한데, 친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더라도 유전자조작으로 진화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미리 파악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고 그런 위험성을 감추려는 몬산토 같은 거대 기업들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원래의 입장을 바꾸지는 않지만, 평평한 지구론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만큼 상대방이 틀렸다는 확신을 갖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이고, 이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작이라고 평가합니다.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이 그런 믿음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근거의 제시를 통해 유연하게 믿음을 바꿀 여지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믿음이 정체성의 일부가 되면 정보와 근거를 제시하고 논증하는 것만으로 믿음을 바꾸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으면서 상대방이 제시하는 논증과 근거를 피해가는 방법은 풍부하고,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는 데 능숙한 우리의 정신은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는 근거들을 가볍게 외면하거나 뿌리칩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우선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외면할 때, 잘못된 믿음은 더 힘을 얻고 퍼져나갑니다.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라도, 우리는 잘못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박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박모 님께서 공론과 관련해 썼던 제 글에 답글로 달아주셨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또한 충분히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믿음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방식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논쟁을 하고 공격하기보다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신뢰를 구축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자의 글에 제 생각을 섞은 표현이지만, 서로 다른 믿음을 갖고 대결한다는 프레임에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함께 찾아간다는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대화는 쉬운 일이 아니고 좌절감을 안겨줄 때가 많지만, 이렇게 성실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또한, 하나의 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문장으로 표현된 주장보다 같은 이야기를 도표나 그래프로 표현한 근거로 제시할 때 더 쉽게 믿음을 바꾼다고 합니다. 아마 텍스트보다 숫자들을 볼 때 정체성이 위협 받는다는 느낌을 덜 받는 것 같습니다. 좀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논리를 통한 설득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지만 숫자 등 객관적인 데이터와 정보는 좀더 쉽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듯 합니다. 잘못된 논리를 믿었다는 건 자기가 바보였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 새로운 정보를 보고 판단을 바꾸는 일은 쿨한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표나 그래프를 잘 쓰지 않고 장문을 써대는 저로선 불리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은 100%의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상대방에게도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판단이란 현재로서 가능한 최선의 가설입니다. 
코로나를 대처하는 방법을 가이드하면서 과학자들은 실수를 저지르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코로나 초기에 마스크를 쓰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자신이 가진 본래의 믿음이나 가치관보다 새로 발견되는 객관적인 근거에 맞추어 자신의 믿음과 판단을 업데이트하고자 노력합니다. 백신이 안전성을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백신의 위험보다 백신 접종을 통한 전염병 방지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현재까지 알 수 있는 것들을 토대로 내린 최선의 결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설보다 더 의존하기에 나은 가설이라는 입장에서 대화를 나눈다면 더 생산적인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에서 하나만 건진다면, 저는 "입장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대화를 포기해선 안된다."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만 더 추가를 한다면, 좀 뜬금 없으시겠지만, "트럼프는 정말 위험한 대통령이었다."일 것 같습니다. 

 

(최초 작성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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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날 미국 여성들이 삶을 살아가려는 방식에 뭔가 아주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됐다. 나는 아내이자 세 명의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반쯤은 죄책감에, 반쯤은 건성으로 살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내 능력과 지식을 집 밖으로 벗어나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처음으로 내 인생의 물음표를 감지했다. 
이 문제는 오랜 세월 미국 여성의 마음 속에 암암리에 묻혀 있었다. 이는 낯선 동요이자 불만감이고 20세기 중반 미국 여성들이 겪은 갈망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은 제각각 혼자서 이 문제를 괴로워했다. 침대를 정리하고 시장을 보면서... 주부들은 스스로에게조차 "과연 이게 전부일까?"라고 조용히 묻기가 두려웠다. 
           
- 베티 브리단, <<여성성의 신화>> 1963년. 
 
베티 브리단은 미국의 여성 언론인으로서, 1942년 명문대학 스미스 칼리지에 다녔던 동문 대부분이 어떤 종류의 임금 근로에도 종사하지 않고 조용히 자포자기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위와 같은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와 같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갇힌 생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에겐 가정을 돌보고 아주머니들끼리 어울려 그렇고 그런 친목을 나누는 일 외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으셨죠. 
남성들이 가질 수 있었던 사회생활의 기회에 비해 여성들의 삶은 많은 제한 속에 갇혀 있었고, 페미니즘은 선거권 차등 부여 같은 노골적인 차별을 넘어서서 여성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제한을 벗으려는 노력들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글은 1963년에 쓰여졌는데, 현재는 어떨까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늘어났고 예전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직업이나 조직에 따라, 가정과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어서 페미니즘의 역할에 대한 공통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예전에 비한다면 생활 수준의 향상과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기술들의 발전으로 여가를 누리는 방식이 다양해지다 보니까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것이 덜 답답해진 것 같고, 반면 직장 생활의 상대적 장점이 떨어진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글은 아니고, 책을 읽다 보니 위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소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피터 퍼타도가 지은 '매일 매일의 역사'로 일자마다 그 날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원문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위 글은 책이 출판된 2월 19일에 해당합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의 삶이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지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2.7.24일 최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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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즌 하나가 남아 있긴 하지만, 리뷰를 쓸 동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소설이 출간된다면 읽으면서 드라마와 비교하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것 같은데, 아직은 소식이 없네요. 

그동안 제 리뷰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셨던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지난 시즌의 클라이막스는 백귀 잡으로 떠나는 원정대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존 스노우와 조라 모르몬트, 산도르 클레가네와 베릭 돈다리온과 토로스, 토르문드, 겐드리. 

서로 별개의 플롯을 따라왔던 주요 인물들이 한데 모여 원정대를 구성합니다. 

실제 원정대의 숫자는 몇 명 더 많은데, 이들은 모험의 와중에서 위험한 대상과 주인공들 사이에서 희생자의 역할을 합니다. 


설령 이 전체 이야기가 백귀에 맞서 인류를 구원하는 스토리이고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여러 고난들이 이러한 섭리의 과정이라고 한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좀비 북극곰에 처참하게 물려 죽는 이 엑스트라들에게 그러한 섭리는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 신의 섭리나 세계의 깊은 의미는 결국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정대의 누군가(토로스, 아니면 베릭?)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군인일 뿐이고, 군인은 그냥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고. (기억나는 대로 쓴 거라 원래 대사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아마 수많은 컨텐츠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주제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익숙한 인간은 항상 자신의 목적을 투사하여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인간의 희망과 목적, 고통과 두려움에 무심한 듯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무한한 세계 속에서 티끌처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은, 의미를 묻지 않고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부디 행복한 한해를 보내시고,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더라도 힘내서 걷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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