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쟁패에 대한 역사책을 읽다 보니 유방과 항우가 대결하는 자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열 가지 죄를 들어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쓰여지기 때문에 승자의 미덕은 부풀려지고 패자의 잘못은 부풀려진다. 
하지만, 천하의 패권이 정해지기 전에 유방이 항우를 비판하면서 지적한 열 가지 잘못은 팩트에 기반하고 있고 당시 여론으로도 항우 쪽의 잘못이자 약점으로 인정받을 소지가 많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대표적으로 항우는 진나라의 항병 20만명을 학살한 업보가 있다. 패왕별희의 낭만이 그의 업보를 다 가릴 수는 없다. 
그에 영감을 받아 이재명 대표의 잘못을 명백하게 지적해 보고 싶었다. 정치란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무슨 현실을 앞세우든 간에 그 근본은 명분의 싸움이다. 
열 가지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다섯 가지나 일곱 가지일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자주 활용되어 온 기법인데, 내가 지지하는 명분을 밝히고 상대측의 명분 없음을 지적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재명 대표의 대표라는 직함은 생략하려고 한다. 그래야 좀 격문 같은 맛이 나는 것 같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였으나, 두 달 만에 연고도 없는 유리한 지역구를 찾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면서 그것이 책임을 지는 일이라 말하여 책임이라는 말의 가치를 떨어뜨렸으니 그것이 첫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본인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음에도 당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 민주당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를 보상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두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하였고 또한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이를 번복하고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하여 자신이 한 말을 뒤집고 당이 명분을 잃는 위험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세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에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들을 모욕하고 배척하는 강성 지지자 및 정청래 등 소위 친명 정치인들의 행태를 제지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고 당의 문화가 반민주주의적이 되도록 방치하였으니 이것이 네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명을 하지 않았고 대선 과정에서도 이런 단순한 의혹들에 대처를 하지 못해 패배를 자초하였으니 이것이 다섯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음주운전, 욕설, 검사사칭 등 여러 범죄 및 비도덕적인 행위 전력이 있어 민주당이 상대 측의 잘못을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였으니 이것이 여섯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형식적인 답변을 반복하거나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동문서답하는 등 유권자를 대변하는 언론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펼칠 역량이 없음을 보였으니 이것이 일곱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대한 검찰의 수사가 의도적인 보복 수사라고 하는 비객관적인 전제의 주장을 야당의 당대표 지위를 보유한 채 반복하였고 민주당이 그런 전제 하에 당의 입장을 세우도록 유도 내지는 방조함으로써 개인의 유무죄 판결 여부에 공당의 정치적 운명이 결부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여덟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당의 혁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혁신위원장에 극단적 발언을 일삼은 함량 미달의 인사를 임명하였다가 문제가 되자 9시간 만에 번복함으로써 사람을 보는 식견이 없음을 드러냈으니 이것이 아홉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선거제도에 대한 자신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정치인 및 정치학자들이 퇴행이라고 평가하는 병립형 비례선거제로의 회귀를 시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멋있게 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발언을 통해 승리가 명분보다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유권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보인 열번째 죄이다. 
 
이상의 죄를 열거하면서 대장동이나 위증교사 의혹 등 재판 중에 있는 사안은 넣지 않았고, 오염수 방류 반대를 명분으로 내건 단식 등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항목들도 넣지 않았다. 아마 넣을 만한데 넣지 못한 항목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원칙과 상식' 토크쇼에 모여 민주당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너'라고 외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재명 대표의 잘못들의 중대함에 동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 이재명 대표의 퇴진은 민주당의 혁신을 위한 최소 조건이다. 하지만 퇴진 가능성도 적을 뿐더러 퇴진을 한다고 하더라도 친명계의 헤게모니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명분을 잃은 당 대표와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정당을 상대 정파가 더 나쁘다는 이유로, 또는 그 소위 내 이념적 성향에 그나마 가까운 정당이라는 이유로 지지해야 하는 것일까? 
명분과 신뢰를 잃은 정당이 이념인들 제대로 대변할 수 있겠으며, 이념과 합리성이 함께 해야 할 문제들에 좋은 정책과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제3지대는 필요하다. 더 나쁜 세력을 막기 위해 다른 세력을 지지해야 하는 인질과 같은 상황은 벗어나야 한다. 
대통령 한 사람 이상하다고 망하는 나라라면, 어차피 망할 나라이다.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는 아니라고 믿는다. 
싫은 자들을 징계하는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정치를 시작해야 하는 때이다. 
(2023.12.22일 최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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