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생각 줄이기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일이다.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 선택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뿐 아니라,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활 전체에 드리우는 제약은 삶 전체의 스타일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심리학 전문가가 선택을 하는 방법에 관련해 조언하는 내용에 대해서 링크를 참고할 수 있다. 

핵심은, 선택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적합한 대안 중에서 많은 고민을 하지 말고 고르라는 것이다. 적합한 대안이란, 내 나름대로 표현하자면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대안이며, 뭔가 일이 잘못되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오는 대안이다. 

또한 얼마 전, 페이스북의 CEO 마크 주커버그가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 이유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최소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링크적어도,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느냐 짬뽕을 먹느냐 갖고 5초 이상 고민하지는 않아야 한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운이 나쁘면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오는 대안인지 여부부터 확인해 본다. 그런 대안을 제외한 나머지 대안들 중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른다. (직관을 따르거나, 선택의 이유가 담긴 간단한 스토리 하나를 만들어내거나, 주사위를 굴린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라면, 시간을 따로 정해 그 안에서 고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무의식으로 고민이 진행되도록 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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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1장은 인식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식의 틀에서 벗어날 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무욕이관기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자기계발 서적들이 흔히 제공하는 조언들은 이와 달리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해라,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우라, 습관을 변화시키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라,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이런 이런 것들을 명심하라, 배우라, 변화하라, 통제하라.... 

우리는 일순간 일순간 최대로 좋은 것들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삶을 산다. 
일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고자 하고, 여가시간에는 가장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그런 생활과 사고의 습관이 우리 정신의 한 부분은 발전시키지만 다른 한 부분은 가두어 잠재우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자신의 행동 하나의 효과를 계산하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는 항상 머리 안에 가득한 자신의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러한 생각들을 놓았을 때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보지 못한다.  

도를 따르는 첫 걸음은 생각을 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을 놓지 못하는 큰 이유는 우리가 생각을 통해 뭔가 변화를 가져 오고 더 나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류의 생각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우리는 지나친 변화의 강박을 피해야 한다. 변화에 대한 강박에서 걱정과 불안이 생기고, 부러움이나 열등감이나 여러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감정들에서 나오는 생각들도 과감히 끊어버리지 못하게 된다. 

인생을 넓은 관점에서 전망하면서 큰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매 순간 할 수는 없다. 큰 변화의 모색과 결단의 시간은 인생 전체에서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시간이 길지도 않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강박을 짊어지고 살 필요가 없다. 몇 가지 선택들에서 생각을 덜 해서 손해 보는 일이 있을지 몰라도 그런 것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이며 생각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 것의 효과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다. 

생각의 강박에서 벗어나면, 내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와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동에 망설임이 없기 때문에 행동을 통해 표현되는 내 자신이 내 정체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망설임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을 하면, 다르게 행동했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현재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생각이 개입되면 감정도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경험을 하면서도 그 경험과 나 자신이 일체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느낀다. 아마 이런 느낌이 도에서 벗어나 있는 징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도 없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 내는 연습을 해 보도록 하자. 
우선 매 순간 뭔가를 더 낫게 만들어야 하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을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여기고 거기에 집중하자. 

이것이 도에 가까와지는 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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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가치관은, 목적에 가치를 둔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수단에도 가치가 부여된다. 

구체적인 목적과 수단은 다르지만 많은 철학이 이런 방식이고, 일상적 삶도 이런 방식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궁극의 목적이고, 행복에 도움이 되는 여러 수단들을 탐구하는 것을 윤리학의 주제로 삼고 있다. 

기독교인에게 궁극의 목적은 구원과 천국이고, 공리주의자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 효용이며,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역사의 전진이다.  

철학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때때로 생각하기도 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무엇인가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열심이다. 

궁극의 목적, 이를테면 행복이나 최대의 효용과 같은 가치가 있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어떤 중간목표가 있고, 그 중간목표에 도움이 되는 어떤 수단이 있다. 

그런 식으로 목적과 수단들이 궁극의 목적을 최상위에 두는 피라미드를 이룬다. 

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를 이성적으로 흠잡을 수 없는 체계로 만드는 데 힘쓰고, 일반 사람들은 좀 불명료한 대로 직관과 논리와 여러 가지를 동원해 얼기설기 보수를 해 가는 어설픈 개똥철학에 의존하여 삶을 이끌어나간다.

완성도가 어떻든 우리는 계층화된 가치 체계에 의존하여 삶을 꾸려나가고, 우리의 머리 속에는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최대한의 가치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에 평가를 내린다. 


이런 목적 중심의 가치관은 인간이 가진 지적 본성에 어울린다. 

인간의 지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해 온 것이다. 

목적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수단을 찾고, 목적을 기준으로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 지능의 주요한 역할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을 벗어나 뭔가 의도적인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는 목적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더군다나 이런 목적지향적 성향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더 강해진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협업의 규모와 비중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런 목적이 있어야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고, 기여도가 평가되고,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전통과 관습이 힘을 잃고 변화가 당연시되고 수많은 대안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합리적 사고는 더 지배적이 된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우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지금 영위하고 있는 일과 삶의 방식은 항상 더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질문의 대상이 된다. 

선택을 하거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적을 정의하고 대안들을 평가해야 한다. 


이런 것은 피할 수도 없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목적을 정의하고 수단을 찾고 대안을 평가하며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일들을 그만 두면 특별하게 이루는 일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혹자는 노자의 무위를 이렇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무위가 꼭 그런 의미여야 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우리가 합리를 추구하는 일을 피할 수 없더라도, 합리만으로 가득한 삶은 균형을 잃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기껏 얻어낸 것에서도 순수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언제나 더 나은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항상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대상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에만 신경을 쓰느라 대상의 많은 부분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하고 불완전한 평가에 왜곡된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어떤 대안을 이야기하는가?

노자는 우리 삶의 가치가 특정의 목적을 달성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찾아 낸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갈 수가 있다면, 그 결과와 관계 없이 충분한 것이고, 그 자체가 가치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에 따라, 가야 할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 

만약, 그런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움과 자존감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숙명, 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고 확신할 수가 있는가? 

우리가 내린 결정들이 옳았는지, 더 나은 최선이 없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자꾸 목적 중심의 사고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다시금 도의 효용, 다른 목적이나 기준에 비추어서 도의 가치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습관은 우리에게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우리는 항상 무엇이든 그 효용을 묻고 그에 따라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노자에게 있어서 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필연이고 그 자체가 가치이다. 


하지만, 도를 따라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떤 길이든 다 도이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가든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도를 따른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이 어려운 점이다. 모두가 도일텐데, 어떤 도를 다른 도와 차별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길을 찾는다. 

내 온 존재를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가는 길을 나의 숙명과 일치시켜 나가고자 노력한다. 

내 온 존재라고 하는 것 안에는 내가 가진 목적, 습관, 믿음, 무의식, 욕구, 추론, 직관이 모두 포함이 된다. 

나는 길을 찾고 길을 걸으며 그 과정에서 내 존재가 변화해 나가고, 그렇게 변화된 내가 다시 길을 찾아 걷는다. 

그렇게 길을 찾아 걷는 것이,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역할이자 의무의 전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번민, 불만, 갈등, 망설임, 의혹 따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나의 역할을 다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충분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결정이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노자가 이야기해 줄 수 없는 나의 목적과 믿음과 욕구가 무엇인지 되돌아 보고 불확실성 앞에서 갈등을 해야 한다. 

노자가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최선을 다했다 다하지 못했다는 인식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집중하고 노력했다고 스스로를 정직하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그러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지,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당신의 온 존재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이 당신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동안 걸어가면 된다. 


사고의 관점을 조금 바꾸어 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목적이나 결과, 가치에 집착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지를 인식한다면, 길을 만들면서 걸어가는 도인의 이미지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활에서 분명히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울리는 BGM(배경음)을 바꾸는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와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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