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글을 앞에서 인용했지만, 그의 글 중에는 노자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알랭 드 보통의 지론 중 하나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지만 이성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실천하고, 그 결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라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세우고 만든 목적과 계획, 지식과 믿음에 영향을 받는 것 못지 않게 주변의 환경, 몸의 상태, 습관, 무의식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진리를 전하여 한 번 믿게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식과 설교와 기도 등을 통해 진리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고 마음에 배어들게 하는 데 힘쓴다.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의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멀어졌던 과거의 깨달음을 다시 느끼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된 진리에 대한 이해와 납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인간의 전존재를 통해 반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기존에 진리라고 배운 것들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명한 진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두고 검토하여 새로운 진리의 체계를 쌓아올리고자 했다. 

다만 그러한 체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상식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로 했다. 

그의 삶은 어딘가 구경꾼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도 강하게 연루되지 않고 자신의 경험들을 철학을 위한 관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시도는 용감한 것이었고 가치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노자의 접근 방식은 좀 다르다. 

언어로 표현된 어떤 진리를 표현하고 증명하였다고 해서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진리에 따라 살겠다는 결심과 의지만으로 도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달은 이후에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깨닫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도를 따라 하늘을 운행하듯, 인간의 몸과 정신, 자아와 세계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길을 만들고 그 길에 따라 걸어간다. 

깨달음이란 그런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마음의 상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 위에 있을 때의, 또한 도 위에 있도록 하는 마음의 상태가 깨달음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더 많은 사실과 지식을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더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길을 벗어나지 않고 운행하는 법을 배우듯, 우리는 길을 가면서 길을 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도에 대한 깨달음, 또는 도와 합치되는 상태가 일종의 마음의 상태라면,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수양, 즉 지속적인 실천과 노력이 필요하다. 


통상적인 가치체계에서 가치의 흐름은 욕구에서 목적이 생기고, 목적에서 수단이 나오고, 수단으로서 진리가 탐구되고 활용된다.

즉. 진리를 알기 위한 노력은 궁극적인 가치인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노자의 가치체계에서는 도에 대한 깨달음과 도를 따르는 것은 서로 구분할 수가 없고, 도를 따르는 것, 그 길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즉 수양 그 자체가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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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1장에 무욕이관기묘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무욕은 욕심이 없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사과를 그리는 화가처럼 몇 가지 예를 들긴 했지만, 아래 글을 읽어 보니 역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는 비슷한 생각이라도 훨씬 재미있게 표현하는구나 싶다.

노자에 관련해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글인데 원문에는 알랭 드 보통의 글 뿐 아니라 노자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도 담겨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보시기 바란다. 

원본 링크 : https://www.facebook.com/faustcollege/posts/5716706928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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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언어는 그 지속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권태,짜증,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어떤 사건이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사건은 추상화된 의미와 저자의 의도라는 미명하에 그 다양성을 상실한다.

클로이와 나는 상당 기간에 걸쳐서 사랑했고 그 시간 동안 나의 감정은 감정적인 계단을 워낙 광범위하게 가로질렀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고 단순화에 대한 욕구가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략에 의해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했다는 말은 그 사건들을 잔인하게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함께 보낸 주말을 단 한 단어 "유쾌했다'는 말로 기억할 수 있고 질서와 정체성을 만들어냈으니,언어가 위선임을 용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끔은 말 밑의 흐름,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강 밑에 흐르는 물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얼마나 쉽게 들리는가?

마치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거나 프루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더 복잡했던가?

한 가지를 말하면 곧 다른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모든 주장은 수많은 반박을 억압했다는 상징이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고,이성에는 시간으로 제한된 범위가 없기 때문이고,유통기한이 없기 때문이다.

배신의 전형적인 시나리오에서 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묻는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X에게 빠져서 나를 버릴 수 있니?" 그러나 시간을 고려한다면 배신과 사랑 사이엔 모순이 없다.

(중략)

클로이의 생일 카드를 쓰는 과정에서 갑자기 내 펜은 종이 위에 정지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그럼에도 그 핵심은 어쩐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너무 의미가 깊어서 아직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고백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어려움과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통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도 그 말들이 서로 다른 원천에 뿌리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 책들이 서로 다른 대목에서 감동을 주었으며,결국 우리 각각에게 다른 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 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내 마음 → ㅅ ㅏ ㄹ ㅏ ㅇ → 그녀의 마음

클로이와의 저녁 식사에서 나는 나의 클로이에 대한 마음을 'ㅅ ㅏ ㄹ ㅏ ㅇ'이라는 수송 수단에 태워 보내려 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서 나는 우연히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선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남용되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보다 그 말이 나의 마음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부터 나와 클로이와의 사랑은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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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핵심 개념은 물론 도이다. 

도는 길, 즉 따라가는 어떤 궤도를 뜻한다. 

도는 천지의 시작부터 계속하여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를 주재하는 원리이다. 

행성들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대기는 순환하며, 생명체는 진화의 경로를 걷고, 인류의 역사도 진화해 나간다. 

도는 세상 모든 사물에 작용하고, 그 대상에서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주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감각을 받아들이고 이성의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며 실행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프레임에선 나와 세상은 어떤 경계로 나누어져 있고 나는 세상의 법칙에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그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결정한다. 

하지만, 도에 따라 세상 만물이 변천해 가고 그 과정 중에 놓여 있는 작은 매개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프레임이 달라진다. 

도는 바람을 움직이듯 나의 몸을 움직이고 나의 정신을 움직인다. 

나는 나의 정신의 주인인 듯 여기지만, 내 정신은 몸의 상태, 외계의 자극,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상념들, 내가 알지 못하게 갖고 있는 전제와 편견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아마도,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듯 외치는 자아의 소리를 낮추고 세상을, 그리고 나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것이 도에 다가가는 한 방법일 것이다. 

자아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하지만 넓은 시야로 보자면, 나는 유유하게 움직이는 넓은 세상에 잠시 몸을 담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다만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인지, 아니면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나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없는 부분들은 내게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 

나를 중심으로 한 관점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세상의 한 부분으로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얻어내느냐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이 얻어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고 도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하나의 궁극적인 동기만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열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 나를 데리고 간다. 

믿음과 충동, 이성과 감정, 배고픔과 외로움, 목적과 결심, 두려움과 희망, 사상과 환상이 우리를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어느 바람을 따르든 도를 따르는 것이지, 도에 따르는 사람과 도에서 벗어난 사람 사이에 구분이 있는가? 

되는대로 충동에 따라 사람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투쟁하듯 사는 사람,

남들과 비슷하게 평범한 생활을 하며 가족을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

더 많은 명예와 지위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

일상적인 생활의 여유는 최소한으로 누리면서 음악이나 글쓰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보람을 찾는 사람, 

누가 도를 따르고 누가 도에서 벗어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노자라면 어떻게 답변하였을지 모르겠다. 

내 의견으로는, 도의 기준으로 어떤 삶을 더 낫다, 낫지 않다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후적으로 보자면,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은 것이고, 각자의 도에 따라 산 것이다. 

그렇다면 도라고 하는 개념에 어떤 소용이 있을까? 도에 부합되게 살고자 노력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도라는 개념은 딱 한 단계 더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든, 가치관이든, 충동이든, 감정이든, 

자신을 하나의 방향으로, 외곬로 몰아갈 때, 

도를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 그 무엇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자신이 집착하고 있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큰 도의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도라고 하는 개념의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의 바람에 휩쓸려 가다가, 그 바람을 빠져 나와 자신의 안과 주변을 불어 가는 바람들을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서, 

바람의 힘들을 엮고 스스로의 작은 힘을 보태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인의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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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나의 바람을 빠져나온다고 해도 그곳에도 바람은 불고 있을 것이고, 청정한 관조의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딱 한 단계 더 초월한다는 표현을 썼다.

전체를 조망할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런 존재가 있다면 신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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