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말에서는 선하다는 것과 좋다라는 것은 좀 다른 의미를 갖는데, 영어에서 'good'이라는 단어가 양쪽 모두의 뜻으로 쓰인다. 
선하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 자기의 이익 못지 않게 다른 사람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적 기준을 잘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약간 낯설 수도 있는 관점에서, 선하다는 것은 유능하다는 것이다. 

윤리적 관점에서의 선함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해 갖는 영향력에는 그 사람의 선한 의도 뿐 아니라 유능함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의도는 선하지만 무능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한 것일까? 

이런 식의 사고를 밀고 나가면, 니체식으로 도덕을 지킨다는 건 약함의 표시이고 강함이야말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능력있는 상사가 착한 상사보다 낫고, 유능한 지도자가 도덕적인 지도자보다 나으며, 착한 남자친구보다 능력있고 재미있는 남자친구보다 낫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가치, 선, 착함, 능력, 윤리, 좋음과 같은 개념들이 이리저리 섞여서 이야기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기 쉽다.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도덕성, 선량함, 능력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능력이 곧 선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능력을 선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한다 라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착하다는 것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양보하고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성격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선하다는 것은 착한 것과는 좀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우선 도덕적 기준을 따르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적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르다. 
구체적인 도덕적 기준은 다르더라도 자기의 충동이 아니라 윤리와 양심에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을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의 충동과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복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정의에도 어려운 점이 있다. 
예를 들어 군부독재시대에 고문에 종사한 사람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간첩을 잡아내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가 만약 고문하는 일에서 쾌락을 느꼈다면 악한 것이고,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참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그 일을 했다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정말 자기 소신으로 그렇게 믿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양심의 눈을 가린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당신이 하는 행동의 동기가 정말 선한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의 만족감과 자긍심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진 이기심과 양심의 정도는 서로 다 비슷한데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닐까? 

내 생각에 선하다는 것은 제약이 많이 따르는 개념이다. 
선한 사람과 선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선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이라는 개념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자기 자신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을 위한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 자신의 심리적 필요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선해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동기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어떤 행동은 하는 것이 옳고 어떤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그 행동의 영향이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보일 때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옳다는 판단과 내 실제 행동이 일치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함의 의미이다.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은 다른 사람과 다를 수도 있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합리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옳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꾸준하게 해 나갈 때 사람은 새로운 판단력과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선함이란, 일관성에 가까운 뜻이 된다. 

선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 적용할 때는 좀 다르다. 
우리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착한 몸매' 같은 용법에서 그런 감수성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좋음'이나 '훌륭함'과 다른 뜻을 가지는 '선함'의 영역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사심없이 남을 위하는 행동이나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일종의 감탄 같은 것을 느낀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순수한 관심,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 
그런 감정을 스스로 느낄 때는 선하다는 평가를 할 수 없다. 
평가를 하는 순간 그 감정은 변질이 된다. 
(스스로가 선하다는 인식과 순수한 감정이 병존하는 환희의 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선함을 느낄 때, 또는 그런 감수성이 그 사람의 특질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좋은 예술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선량한 사람에게서 느끼게 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스스로는 선해지려고 하지 마라. 다만, 선한 행동을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관대함을 갖고 선량함을 발견하라.


반응형

첫째로는 건강.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당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의 눈에도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비쳐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사람이 한둘 곁에 있는 것. 

책이나 음악처럼 쉽게 손댈 수 있고 물리지 않는 취미. 

배고프지 않고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요즘의 일반적인 필수품들, 즉 휴대폰 같은 것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 

육체적인 고통이나 지나친 스트레스나 권태나 격무 등으로 너무 많이 고통스럽지 않은 직업. 

이 정도가 갖추어지면 대략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사회의 생산력은 이 정도를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위에서 열거한 조건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아도 저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경제적 수입을 갖추지 못했거나, 직장이 너무 스트레스이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적절한 취미를 갖추지 못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좋아 보여도 제대로 된 친구 한 사람이 없거나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여 정붙일 곳이 없는 사람들... 

또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행복이란 기본적인 조건들의 충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더 많은 즐거움의 기회를 찾는 데 몰두하느라, 계획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후회하고 비교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데 시간과 마음을 뺏기느라, 집중해야 할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이론이 말해 주는 것처럼 새로운 욕구에 몰두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불만이 많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행복한 상태에서 추구를 계속하고 있을 뿐으로, 불행 속에서 절박하게 빠져나오려고 하는 자들의 추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들에서 시사점을 찾아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먼저, 행복에도 수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1부터 10000까지 가능한데, 어떤 사람은 9000레벨에 있고 어떤 사람은 100레벨에 있다, 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 것. 

기본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마음을 제대로 다룬다면 당신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고,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도 불만족 속에서 추구를 계속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을 버릴 때, 당신은 움직임이 더 자연스러워지고 가벼워질 것이고, 아마도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이루는 여러 기본적인 조건들을 세심하게 가꿀 것. 모험을 할 때는 위험을 염두에 둘 것. 

특히, 당신의 마음에 와 닿는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면, 성의를 다해 관계를 가꾸어나갈 것. 생각보다 그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함의를 찾는다면, 사회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의 총합을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지 말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알아서 잘 해 나갈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키우는 일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조건들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흔한 말로 요약하면,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다. 

하지만 소득의 재분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경쟁의 완화, 공공서비스의 확대, 특히 문화 분야에 대한 지원, 근로시간의 단축, 자긍심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의 공급, 질병과 천재지변이나 경제의 불확실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전락할 수 있는 경우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보험의 확대, 지식보다 경험의 기회를 주는 데 중점을 두는 교육 등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행복의 기본 요건에 해당하고,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해 그런 여건들의 충족이 일반화될 수 있을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일들은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다른 가치들을 이에 종속시키는 관점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반응형


선택의 패러독스

저자
배리 슈워츠 지음
출판사
웅진닷컴 | 2004-09-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간 선택 심리의 비밀을 찾아가는 새로운 개념의 교양 심리학 서...
가격비교

요즘에도 에리히 프롬을 많이 읽는지 모르겠다. 내가 학생 때는 에리히 프롬의 책들이 꽤 많이 읽혔다. 

사랑의 기술, 소유와 존재, 존재의 기술 과 같은 책들. 
이 책들은 읽으면서 상당히 감명이 깊었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나는 소유 관점과 존재 관점을 구분하는 것에 좀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이건희 회장은 소유 중심의 삶을 살고 있을까 존재 중심의 삶을 살고 있을까?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니 당연히 소유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본인은 돈보다도 돈을 버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험들에 가치를 두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그 구상이 실현되어 수익을 거둘 때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사업가는 소유 중심의 사람일까, 존재 중심의 사람일까?
다른 예로, 같은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사려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다녀오려는 사람도 있다.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 명품 가방을 선호하는 사람보다 더 존재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것일까?
어떤 사람은 여행의 경험, 여행의 추억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경험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물건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아마 책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에리히 프롬의 교훈을 실생활에 적용할 때면 이런 식의 혼란이 따랐다. 

그런데 나중에 읽게 된 '선택의 패러독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처세에 관한 책(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나 습관 등에 대해 실용적인 조언을 주는 책)들 중에서 가장 유익했다고 생각한다.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줄쳤던 부분들을 읽다 보니 이 책의 교훈들을 제대로 마음에 새겨 실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후회를 줄이라는 것이 이 책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소유와 존재라는 구분 대신, 극대화자와 만족자라는 구분을 둔다. 
극대화자(maximizer)는 가능한 최선의 것을 얻는다는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만족자(satisfier)는 만족스러운가 여부의 기준으로 선택을 한다. 
티비 앞에서 리모콘을 돌릴 때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를 만났을 때, 그 프로를 보는가, 아니면 더 나은 채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채널돌리기를 계속 하는가? 
이것이 극대화자와 만족자를 구분하는 방식의 한 예이다. 
경제학원론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란 극대화자의 선택이다. 가능한 대안들 중에 비교를 통해 최선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족스러운 대안이라고 하더라도 더 나은 대안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탐색을 계속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극대화자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기에 상당히 불리하다. 인생은 경제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단순명료하지 않다. 
만족자도 극대화자만큼 까다롭고 양보가 없을 수 있다. 자신의 기준에 만족하다는 평가를 내릴 때까지 까다롭게 대안을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대안이 나타나면 더 이상의 탐색은 포기한다. 
만족자는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를 덜 하는 편이고,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더 나은 대안을 상상하지 않으며, 비교를 하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집중한다. 
만족자에게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사람은 선택의 결과로 얻어지는 기회나 경험에 더 집중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상상이나 비교에 의해 산만해지지 않는다. 
극대화자에 비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적고 기준도 단순하기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선 과감하게 선태하는 편이며, 덕분에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해서 세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반면 극대화자는 음식 메뉴나 시간을 보낼 영화 고르기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서도 최선을 선택하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경향이 있으며, 
정작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는 기진맥진해지는 경향이 있다. 

에리히 프롬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소유 지향의 삶이란 가능한 최선의 것을 얻어내려는 자세로 사는 삶이고, 존재 지향의 삶이란 만족을 지향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에 집중하는 삶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