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이라는 책의 저자는 평범의 왕국과 비범의 왕국을 구분한다. 

평범의 왕국에서 성과는 노력에 비례한다. 
사람마다 재능에 편차는 있지만 노력을 비슷하게 하는데 재능만으로 몇 배의 성과 차이가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과의 편차는 사람마다 재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종 모양의 정규분포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비범의 왕국에서는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해리 포터의 작가가 한 권의 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수만명의 무명작가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가수, 운동선수, 투자분석가, 발명가 등의 직업은 비범의 왕국에 속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 왕국에서는 성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몇만배 더 많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노력을 하거나 더 적은 노력을 하고도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일이 생긴다. 

작가나 연예인의 경우는, 만들어낸 결과물이 쉽게 복제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수가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데 들어가는 노력은 비슷하지만, 그 노래를 수만명이 함께 듣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몇 사람만 듣게 될 수도 있다. 
똑같이 피나는 연습을 하더라도 운과 재능에 따라 결과는 수십만배의 차이가 난다. 
투자분석가나 CEO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남들의 노력이나 자산에 자신의 재능을 더하여 성과에 차이를 가져 온다. 
그들에게 실력과 재능이 있다면, 혹은 그렇다는 명성이 있다면 그들은 수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자원에 비례하여 자기 몫을 챙긴다.
한편, 스타 야구선수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20% 정도 더 자주 안타를 때릴 수 있다는 이유로 몇천배의 연봉을 받는다. 
그들의 성과는 노력의 직접적 산출물이 가져다 주는 효용보다 경쟁자보다 더 나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1%라도 더 나아서 항상 이길 수 있다면 그들은 거의 모든 가치를 차지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비범의 왕국이 더 우세해지는 것 같다. 
남사당패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정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은 TV 등을 통해 무수한 대중에게 자신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연예산업은 승자독식의 경향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지식도 늘어난다. 
성과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자본이든 재능이든 가진 것에 의해 성과가 좌우되는 비율이 커지고 있다. 
로봇과 컴퓨터의 시대에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의 가치는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 하락, 노력에 의해 성과가 영향받는 비중의 감소는 소득의 편차를 계속 확대시킬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너무 빨랐다. 
그는 생산력의 고도화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자동화, 노동가치의 하락, 실업의 만연, 만성적 불경기, 소득불균등의 심화, 자본의 집중이다. 
이런 현상들이 대기업의 투자 활성화로 일자리를 늘린다는 처방으로 해결이 될까? 
대기업의 투자는 대기업의 자본집중을 심화시킬 뿐이다. 
일자리는 단기적으로 늘어나겠지만 임금은 더 줄어들 것이고 경기는 다시 나빠질 것이고 실업은 다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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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멸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가 올 것이다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부분은, 자본주의가 악하기 때문에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법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멸망할 것이라는 부분이다. 
그의 예언은 물론 틀렸고, 이론에는 한계가 많다. 
생각해 보면, 그는 19세기의 수많은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론에서 틀린 점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이 완전히 유효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부당하고 사악한 대변자 역할을 했던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에 더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들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고 경제력이 집중되고 있다. 
경제력 집중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고도화와 다가오는 파국의 징후이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을 보자.  
자본은 본성 상 지속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가는데, 초기의 자유경쟁은 점차 소수의 독점자본 간 경쟁으로 바뀌어 간다. 
자본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져가고, 자본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곳을 찾지 못한다. 
자본의 수익성은 하락하고 공황이 찾아오며, 소외된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자본, 즉 생산수단을 공공의 소유로 만든다. 
이 그림은 80년대보다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많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교정을 통해 지속해 나간다. 
현대의 자본주의국가는 독점을 막기 위해,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부가 재분배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사이에는 중간적인 사회들이 많이 존재하고 어떤 국가든 순수한 자본주의 원리에만 맡겨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들이다. 
그렇지만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역할은 자본의 논리에만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권을 가진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부분도 상당히 높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부르주아와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제한적이다. 
부유하고 이기적인 자본가와 열악한 공장 환경에서 단조로운 노동에 종사하는 극빈층 노동자의 모습은 그다지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억대 연봉을 받는 전문직과 대기업 근로자 뿐 아니라,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도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처럼 계급적 갈등이 심화되기보다는 사회 계층이 다양해지고 일원적 잣대로 규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은 19세기의 관점을 담은, 제약이 많은 이론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생명력을 갖는 것은 다른 주장이 갖지 못하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그리고 영감을 주는 통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본주의는 영속적인 사회질서라기보다 끊임없는 자기조정을 통해 건강성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불안정한 체제이다. 
자유시장 이론은 무한경쟁이 시장을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면 시장이 개입하여 새로운 경쟁자가 이익을 나누어 갖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대자본과 소자본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그 불공정함은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심화된다. 
현재의 대자본은 과거의 대자본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힘의 편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한 경제력의 집중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소외되게 만들고 자본 스스로의 성장 활로를 찾기 힘들게 만들어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역사가 10년 남짓 밖에 안되는 IT 혁신 기업들이 전통적인 대기업들을 망하게 하는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본이 없이 아이디어와 프로그래밍 실력만 가진 젊은 창업가들이 몇 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업을 일구어내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새로운 귀족이 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싶다. 
작은 회사가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벤처캐피탈이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에 자본을 투자하여 성장시키는 것이다. 
대박을 내는 아이디어와 드문 재능을 갖춘 일부의 성공신화에 가리워져 그 뒤에 동작하는 자본의 힘이 가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대기업총수와 일반적인 근로자를 대비시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에 가깝게 자본과 노동의 상징을 찾아보자면, 
남들보다 탁월한 실적을 내는 전문직 근로자와 대리기사를 비교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대리기사는, 차별화된 능력에 따라 성과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표적인 직업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실적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개인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자본을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노동을 '갖추어진 것에 의존하지 않고 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비록 억대 연봉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자본과 노동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가 고도화될 수록,  아무 가진 것 없이 각별한 노력으로 자본을 갖추어나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부잣집 자식들이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성격도 좋고 친화력도 좋다. 
사회적 자본을 쌓아가는 역량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인데, 그런 능력도 가정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재산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그 격차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고, 또한 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실업자와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직업의 종사자들, 언제든 기술이나 다른 환경에 변화에 의해 자신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 가치를 잃고 밀려날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  
절대적인 생활환경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갈 기회는 늘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된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늘어나고 처지가 악화된다고 하는 현상의 현대적 모습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바마도 마르크스주의자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종북좌빨이라 부르지만..


데이터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의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추세에는 직관적으로 맞는 것 같다. 부자들은 여전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이 축적될수록 돈을 벌어들일 곳은 줄어든다. 성장 동력은 떨어지고, 불황은 점점 극복하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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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본디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난 어렸을 때 성선설과 성악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본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일텐데, 굳이 본성이 선하고 악함을 논하여 무엇하려는 것일까? 
이제는 맹자와 순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성선설과 성악설은 어느 한 쪽이 근본적으로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찌 치하에서 평범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광기에 열광적으로 또는 묵묵하게 동참했다. 
하지만 악이 편만했던 시대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다.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의 그리스, 스탈린 시대의 소련,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남김 없이 한 민족을 절멸시키던 고대의 유태인들을 생각해 보라. 
무고한 인질의 목을 베는 IS의 야만은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는 그와 같이 노골적인 모습의 악으로 점철된 사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변을 둘러보라. 
선거로 선출되는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유권자들의 보편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임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언론은 공익과 윤리의 관점으로 사안들을 비판하고, 교수들은 학문적 양심으로 지식에 기반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공직자는 공익을 위해, 경제인들은 자신의 부와 사회의 부를 위해, 저마다 담당하는 곳에서 맡은 직분의 사회적 가치를 염두에 두면서 최선을 다한다. 
우리 주변에는 선량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비웃는 어조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여러 장면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 사회는 정말 드물게 절대적 빈곤과 전쟁에서 벗어난 시대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정말 훌륭한 제도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이 언론과 표현의 보장된 자유 속에서 대중의 평판을 얻고자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치열한 이익 추구가 사회적인 공익에 대충으로라도 합치가 되도록 유도한다. 
이런 구조 하에서 사람들은 한쪽의 삶이 다른쪽의 죽음이 되는 노골적인 힘에 의한 대결을 벌이기보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규칙의 틀 안에서 대중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경쟁하고 추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가 보여 주는 부드러운 낯빛들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과 나찌 수용소에서 경비를 서는 평범한 독일 군인의 모습은 아주 다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선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위하여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감해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악을 악 자체로서 추구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이코는 소수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 양심을 어기는 사람은 사이코보다는 많겠지만 아주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불편하지 않게 치워 두거나 자신의 가치에 맞게 조정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정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이야기해 준다면, 
그에 대한 반론과 공정하게 비교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믿는다. 
당신이 일제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대동아공영권(동아시아 민족들이 함께 번영을 누리자는)의 논리가 귀에 달게 들릴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의 대학생이라면, 조국을 근대화시킨다는 시대의 사명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양심이 편해질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이것이 아마 사람이 선하기도 하면서 악하기도 한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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