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TV] 닥치고 진실

저자
정규재 지음
출판사
베가북스 | 2014-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방송 2년 만에 조회수 1,200만 돌파!‘진짜’에 목마른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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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정규재 씨는 한국경제신문의 주필이고 정규재TV라는 인터넷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보수 논객이다. 

정규재TV는 꽤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은 여러 시사적인 주제들에 대한 보수논객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은 김어준의 책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이유는 내가 평소 거부감을 느끼는 관점들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처럼 전문적인 학자도 아니고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읽기 즐거운 책이란, 70% 정도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또는 희미하게 인지하고 있던 생각들을 명료하게 표현해 주고, 
거기에 미처 생각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더 해 주는 책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성향의 책을 읽으며 그 논리와 근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즐겁지가 않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는 확인편향의 오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유리한 근거들을 수집하는 경향이 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믿음은 강해지고 근거도 늘어난다. 
하지만 어떤 믿음이 실제로 옳은지 그른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아니라 반증하려는 노력의 실패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책을 쓰기 위해 몽테뉴보다는 헤겔을, 하이에크보다는 사무엘슨을 더 많이 읽었다고 말한다. 
비슷한 사고방식의 사람들보다 그가 책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를 본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전문가들은 달라야 한다고 믿지만 과연 그런지는 의문스럽다. 

이 책에 나오는 주장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논리는 명쾌하고 근거들도 풍부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은 것은 노인세대의 자살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고 청년층 이하는 노르웨이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보다 자살율이 낮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율이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힘든 사회라는 근거로 인용되긴 하지만, 자살율만 놓고 본다면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살율 통계는 전체 사회가 힘들다기보다는 노인들의 처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때는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취업 걱정이 없었다면서 지금 청년들이 얼마나 힘든가 라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에는 대학졸업자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그밖에도,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문제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우파로 전향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었다. 
나는 좌파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자본주의사회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믿지 않으며 그 모순을 극복한 더 좋은 사회체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로의 전환은 어느 수준 이상의 생산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점이 100년 후일지 언제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경쟁이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보다 협업을 방해함으로써 발생시키는 비효율이 더 커지는 시점, 
인간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댓가 없이 활동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일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올라간 시점, 
시장에서 주고 받는 신호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효과적으로 집단의 합의를 도출하고 실행하는 방법이 발견되는 시점, 
그 때가 언제일까? 

만약 사회체제의 전면적 변화가 단기적으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규재와 마찬가지로, 나는 현 사회체제 내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좌파적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도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을 규제할 때 그 기업이 해외의 기업들과 지속적으로 경쟁해나갈 수 있을까? 
기술과 환경의 변화로 누군가는 대박을 챙기고 누군가는 가진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사회 속에서 갑을논쟁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논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우파도 신뢰하지 않는다. 
우선 그들은 주로 입신양명과 물질적 성공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두고 있다. 
이기적인 행동이 곧 전체 사회의 공리를 향상시킨다는 시장주의는 그들에게 최상의 복음일 것이다. 
그 주장에는 이론도 있고 논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를 보자. 
정규재는 환경 문제도 환경운동가들의 근거 없는 과장이라고 치부하는 듯 하다. 
하지만 환경 문제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외부효과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더러 잘못 대처할 경우 인류의 멸망까지 가져 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두 가지 대립되는 근거가 있어 하나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를 뒷받침한다면,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기업인이나 우파지식인은 후자를 중시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는 더 큰 위험이 있는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회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루는 시장의 힘을 견제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익의 추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미시적 최적화가 항상 거시적인 최선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시장은 이미 힘이 세다. 
그 힘은 견제받지 않으면 자기 편을 계속 늘려나갈 것이다. 

양쪽을 다 신뢰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미시적인 차원에서 공공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해나가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개별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정규재씨가 옳은지 아닌지를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반론을 함께 놓고 볼 수 없어서이다.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과의 비교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좌는 좌끼리만, 우는 우끼리만 이야기하고 상대편에는 낙인을 찍기에 바쁘다. 
우파는 종북이나 포풀리즘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좌파는 시장주의를 악으로 규정하고 감성적인 접근을 앞세운다. 
정규재 씨의 경우도 상대 진영에 대한 지나친 비하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서로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넓혀 나가야 한다. 
데이터와 근거로 서로의 오류를 수정하고, 좁혀질 수 없는 전제의 차이는 무엇인지, 좁혀갈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 논의의 과정은 투명하게 진행되어 억지가 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지성이 성숙되어지고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익혀가야 한다. 
시장의 논리를 현실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공공의 관점이 시장에 함몰되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가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좌파적 정파들은 (민주당이 여기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담론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지금은 좌파라는 정체성도 없고, 개별적인 문제에 산발적인 논쟁만 여기저기에서 벌어진다. 
담뱃값인상, 경제민주화법, 대기업규제, 중소기업지원, 이런 여러 문제들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다루어져야 하는 사안들이나, 어떤 정파에 존재 의미를 줄 정도로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문제들은 아니다. 
시장주의자의 논리와 근거들에는 설득력이 있으며, 미시적 차원에서의 정부의 관여는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큰 줄기를 잡는 것이 필요하다. 
증세와 복지의 확대, 교육에 있어서의 경쟁의 감소와 같은 문제들이다. 
국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해, 시장주의의 한계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무엇인지를 정립하고 주장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아마, 거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당의 경제정당화 움직임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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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이라는 책의 저자는 평범의 왕국과 비범의 왕국을 구분한다. 

평범의 왕국에서 성과는 노력에 비례한다. 
사람마다 재능에 편차는 있지만 노력을 비슷하게 하는데 재능만으로 몇 배의 성과 차이가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과의 편차는 사람마다 재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종 모양의 정규분포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비범의 왕국에서는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해리 포터의 작가가 한 권의 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수만명의 무명작가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가수, 운동선수, 투자분석가, 발명가 등의 직업은 비범의 왕국에 속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 왕국에서는 성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몇만배 더 많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노력을 하거나 더 적은 노력을 하고도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일이 생긴다. 

작가나 연예인의 경우는, 만들어낸 결과물이 쉽게 복제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수가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데 들어가는 노력은 비슷하지만, 그 노래를 수만명이 함께 듣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몇 사람만 듣게 될 수도 있다. 
똑같이 피나는 연습을 하더라도 운과 재능에 따라 결과는 수십만배의 차이가 난다. 
투자분석가나 CEO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남들의 노력이나 자산에 자신의 재능을 더하여 성과에 차이를 가져 온다. 
그들에게 실력과 재능이 있다면, 혹은 그렇다는 명성이 있다면 그들은 수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자원에 비례하여 자기 몫을 챙긴다.
한편, 스타 야구선수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20% 정도 더 자주 안타를 때릴 수 있다는 이유로 몇천배의 연봉을 받는다. 
그들의 성과는 노력의 직접적 산출물이 가져다 주는 효용보다 경쟁자보다 더 나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1%라도 더 나아서 항상 이길 수 있다면 그들은 거의 모든 가치를 차지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비범의 왕국이 더 우세해지는 것 같다. 
남사당패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정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은 TV 등을 통해 무수한 대중에게 자신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연예산업은 승자독식의 경향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지식도 늘어난다. 
성과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자본이든 재능이든 가진 것에 의해 성과가 좌우되는 비율이 커지고 있다. 
로봇과 컴퓨터의 시대에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의 가치는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 하락, 노력에 의해 성과가 영향받는 비중의 감소는 소득의 편차를 계속 확대시킬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너무 빨랐다. 
그는 생산력의 고도화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자동화, 노동가치의 하락, 실업의 만연, 만성적 불경기, 소득불균등의 심화, 자본의 집중이다. 
이런 현상들이 대기업의 투자 활성화로 일자리를 늘린다는 처방으로 해결이 될까? 
대기업의 투자는 대기업의 자본집중을 심화시킬 뿐이다. 
일자리는 단기적으로 늘어나겠지만 임금은 더 줄어들 것이고 경기는 다시 나빠질 것이고 실업은 다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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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멸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가 올 것이다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부분은, 자본주의가 악하기 때문에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법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멸망할 것이라는 부분이다. 
그의 예언은 물론 틀렸고, 이론에는 한계가 많다. 
생각해 보면, 그는 19세기의 수많은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론에서 틀린 점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이 완전히 유효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부당하고 사악한 대변자 역할을 했던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에 더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들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고 경제력이 집중되고 있다. 
경제력 집중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고도화와 다가오는 파국의 징후이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을 보자.  
자본은 본성 상 지속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가는데, 초기의 자유경쟁은 점차 소수의 독점자본 간 경쟁으로 바뀌어 간다. 
자본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져가고, 자본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곳을 찾지 못한다. 
자본의 수익성은 하락하고 공황이 찾아오며, 소외된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자본, 즉 생산수단을 공공의 소유로 만든다. 
이 그림은 80년대보다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많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교정을 통해 지속해 나간다. 
현대의 자본주의국가는 독점을 막기 위해,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부가 재분배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사이에는 중간적인 사회들이 많이 존재하고 어떤 국가든 순수한 자본주의 원리에만 맡겨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들이다. 
그렇지만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역할은 자본의 논리에만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권을 가진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부분도 상당히 높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부르주아와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제한적이다. 
부유하고 이기적인 자본가와 열악한 공장 환경에서 단조로운 노동에 종사하는 극빈층 노동자의 모습은 그다지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억대 연봉을 받는 전문직과 대기업 근로자 뿐 아니라,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도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린 그림처럼 계급적 갈등이 심화되기보다는 사회 계층이 다양해지고 일원적 잣대로 규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은 19세기의 관점을 담은, 제약이 많은 이론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생명력을 갖는 것은 다른 주장이 갖지 못하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그리고 영감을 주는 통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본주의는 영속적인 사회질서라기보다 끊임없는 자기조정을 통해 건강성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불안정한 체제이다. 
자유시장 이론은 무한경쟁이 시장을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면 시장이 개입하여 새로운 경쟁자가 이익을 나누어 갖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대자본과 소자본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그 불공정함은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심화된다. 
현재의 대자본은 과거의 대자본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힘의 편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한 경제력의 집중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소외되게 만들고 자본 스스로의 성장 활로를 찾기 힘들게 만들어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역사가 10년 남짓 밖에 안되는 IT 혁신 기업들이 전통적인 대기업들을 망하게 하는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본이 없이 아이디어와 프로그래밍 실력만 가진 젊은 창업가들이 몇 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업을 일구어내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새로운 귀족이 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싶다. 
작은 회사가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벤처캐피탈이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에 자본을 투자하여 성장시키는 것이다. 
대박을 내는 아이디어와 드문 재능을 갖춘 일부의 성공신화에 가리워져 그 뒤에 동작하는 자본의 힘이 가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대기업총수와 일반적인 근로자를 대비시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에 가깝게 자본과 노동의 상징을 찾아보자면, 
남들보다 탁월한 실적을 내는 전문직 근로자와 대리기사를 비교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대리기사는, 차별화된 능력에 따라 성과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표적인 직업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실적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개인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자본을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노동을 '갖추어진 것에 의존하지 않고 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비록 억대 연봉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자본과 노동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가 고도화될 수록,  아무 가진 것 없이 각별한 노력으로 자본을 갖추어나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부잣집 자식들이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성격도 좋고 친화력도 좋다. 
사회적 자본을 쌓아가는 역량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자본 중 하나인데, 그런 능력도 가정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재산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그 격차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고, 또한 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실업자와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직업의 종사자들, 언제든 기술이나 다른 환경에 변화에 의해 자신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 가치를 잃고 밀려날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  
절대적인 생활환경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갈 기회는 늘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된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늘어나고 처지가 악화된다고 하는 현상의 현대적 모습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바마도 마르크스주의자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종북좌빨이라 부르지만..


데이터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의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추세에는 직관적으로 맞는 것 같다. 부자들은 여전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이 축적될수록 돈을 벌어들일 곳은 줄어든다. 성장 동력은 떨어지고, 불황은 점점 극복하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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