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날 미국 여성들이 삶을 살아가려는 방식에 뭔가 아주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됐다. 나는 아내이자 세 명의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반쯤은 죄책감에, 반쯤은 건성으로 살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내 능력과 지식을 집 밖으로 벗어나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처음으로 내 인생의 물음표를 감지했다. 
이 문제는 오랜 세월 미국 여성의 마음 속에 암암리에 묻혀 있었다. 이는 낯선 동요이자 불만감이고 20세기 중반 미국 여성들이 겪은 갈망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은 제각각 혼자서 이 문제를 괴로워했다. 침대를 정리하고 시장을 보면서... 주부들은 스스로에게조차 "과연 이게 전부일까?"라고 조용히 묻기가 두려웠다. 
           
- 베티 브리단, <<여성성의 신화>> 1963년. 
 
베티 브리단은 미국의 여성 언론인으로서, 1942년 명문대학 스미스 칼리지에 다녔던 동문 대부분이 어떤 종류의 임금 근로에도 종사하지 않고 조용히 자포자기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위와 같은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와 같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갇힌 생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에겐 가정을 돌보고 아주머니들끼리 어울려 그렇고 그런 친목을 나누는 일 외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으셨죠. 
남성들이 가질 수 있었던 사회생활의 기회에 비해 여성들의 삶은 많은 제한 속에 갇혀 있었고, 페미니즘은 선거권 차등 부여 같은 노골적인 차별을 넘어서서 여성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제한을 벗으려는 노력들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글은 1963년에 쓰여졌는데, 현재는 어떨까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늘어났고 예전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직업이나 조직에 따라, 가정과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어서 페미니즘의 역할에 대한 공통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예전에 비한다면 생활 수준의 향상과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기술들의 발전으로 여가를 누리는 방식이 다양해지다 보니까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것이 덜 답답해진 것 같고, 반면 직장 생활의 상대적 장점이 떨어진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글은 아니고, 책을 읽다 보니 위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소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피터 퍼타도가 지은 '매일 매일의 역사'로 일자마다 그 날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원문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위 글은 책이 출판된 2월 19일에 해당합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의 삶이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지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2.7.24일 최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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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가장 핫 했던 시절은 1987년이지 않을까 싶다. 그때는 권력의 부정의가 명확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한 뜻으로 모였고 정치란 진지한 이슈였다.
그 후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삼십년 가까이 흐르면서, 이제 정치는 우리나라의 3류들이 모여 세력 다툼이나 벌이는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마음대로 폄하해도 괜찮은 거의 유일한 직업이 국회의원이지 않았을까 싶다.
필리버스터는 특이한 이벤트다. 국민이 언론의 편집을 거치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었고, 이렇게 응원한 적도 없었다. 적어도 87년 이후에는 노무현, 유시민 등 특정 정치인 몇 명 외에는 거의 없었다.
인터넷으로든 케이블 티비로든 국회방송을 직접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기껏해야 전국민의 1%가 1시간 정도라도 보았을까? 거기다가 사실 나만 해도 수십분 이상 집중해서 보기는 힘든, 재미없는 이야기가 태반이다.
하지만 언론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다가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직접 지켜 본 소수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정치인에 대해 가져왔던 일반 국민들의 반응과 매우 다르다. 경청하고 지지를 표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알았던 것이 부족했다는 식의 의견들인데, 그동안 냉소와 비판은 넘쳐났어도 정치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일반 국민의 반응으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나만 해도 정치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표 당시 문의원이 억지로 밀려나게라도 된다면 민주당을 지지할 필요는 없어진다, 라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야당은 특정 개인과 그 개인의 지지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부류의 믿음과 태도,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개성으로 구현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정당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들이 언론의 벽을 넘어 아주 일부이더라도 국민에게 직접 가 닿았다. 이것이 숫자 계산을 넘어서 중요한 변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율로는 적더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의 인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들 스스로도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때로 좋은 틀 안에서 집중하여 노력하면, 높은 공덕으로 쌓이게 된다.
참고로 나는 20대부터 24대 국회까지 불출마를 선언한다. 앞으로 16년 동안은 내공이 부족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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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TV] 닥치고 진실

저자
정규재 지음
출판사
베가북스 | 2014-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방송 2년 만에 조회수 1,200만 돌파!‘진짜’에 목마른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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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정규재 씨는 한국경제신문의 주필이고 정규재TV라는 인터넷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보수 논객이다. 

정규재TV는 꽤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은 여러 시사적인 주제들에 대한 보수논객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은 김어준의 책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이유는 내가 평소 거부감을 느끼는 관점들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처럼 전문적인 학자도 아니고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읽기 즐거운 책이란, 70% 정도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또는 희미하게 인지하고 있던 생각들을 명료하게 표현해 주고, 
거기에 미처 생각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더 해 주는 책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성향의 책을 읽으며 그 논리와 근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즐겁지가 않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는 확인편향의 오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유리한 근거들을 수집하는 경향이 있고, 시간이 지날 수록 믿음은 강해지고 근거도 늘어난다. 
하지만 어떤 믿음이 실제로 옳은지 그른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아니라 반증하려는 노력의 실패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책을 쓰기 위해 몽테뉴보다는 헤겔을, 하이에크보다는 사무엘슨을 더 많이 읽었다고 말한다. 
비슷한 사고방식의 사람들보다 그가 책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를 본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전문가들은 달라야 한다고 믿지만 과연 그런지는 의문스럽다. 

이 책에 나오는 주장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논리는 명쾌하고 근거들도 풍부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은 것은 노인세대의 자살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고 청년층 이하는 노르웨이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보다 자살율이 낮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율이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힘든 사회라는 근거로 인용되긴 하지만, 자살율만 놓고 본다면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살율 통계는 전체 사회가 힘들다기보다는 노인들의 처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때는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취업 걱정이 없었다면서 지금 청년들이 얼마나 힘든가 라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에는 대학졸업자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그밖에도,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문제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우파로 전향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었다. 
나는 좌파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자본주의사회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믿지 않으며 그 모순을 극복한 더 좋은 사회체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로의 전환은 어느 수준 이상의 생산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점이 100년 후일지 언제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경쟁이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보다 협업을 방해함으로써 발생시키는 비효율이 더 커지는 시점, 
인간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댓가 없이 활동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일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올라간 시점, 
시장에서 주고 받는 신호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효과적으로 집단의 합의를 도출하고 실행하는 방법이 발견되는 시점, 
그 때가 언제일까? 

만약 사회체제의 전면적 변화가 단기적으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규재와 마찬가지로, 나는 현 사회체제 내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좌파적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도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을 규제할 때 그 기업이 해외의 기업들과 지속적으로 경쟁해나갈 수 있을까? 
기술과 환경의 변화로 누군가는 대박을 챙기고 누군가는 가진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사회 속에서 갑을논쟁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논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우파도 신뢰하지 않는다. 
우선 그들은 주로 입신양명과 물질적 성공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두고 있다. 
이기적인 행동이 곧 전체 사회의 공리를 향상시킨다는 시장주의는 그들에게 최상의 복음일 것이다. 
그 주장에는 이론도 있고 논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를 보자. 
정규재는 환경 문제도 환경운동가들의 근거 없는 과장이라고 치부하는 듯 하다. 
하지만 환경 문제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외부효과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더러 잘못 대처할 경우 인류의 멸망까지 가져 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두 가지 대립되는 근거가 있어 하나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를 뒷받침한다면,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기업인이나 우파지식인은 후자를 중시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는 더 큰 위험이 있는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회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루는 시장의 힘을 견제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익의 추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미시적 최적화가 항상 거시적인 최선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시장은 이미 힘이 세다. 
그 힘은 견제받지 않으면 자기 편을 계속 늘려나갈 것이다. 

양쪽을 다 신뢰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미시적인 차원에서 공공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해나가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개별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정규재씨가 옳은지 아닌지를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반론을 함께 놓고 볼 수 없어서이다.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과의 비교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좌는 좌끼리만, 우는 우끼리만 이야기하고 상대편에는 낙인을 찍기에 바쁘다. 
우파는 종북이나 포풀리즘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좌파는 시장주의를 악으로 규정하고 감성적인 접근을 앞세운다. 
정규재 씨의 경우도 상대 진영에 대한 지나친 비하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서로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넓혀 나가야 한다. 
데이터와 근거로 서로의 오류를 수정하고, 좁혀질 수 없는 전제의 차이는 무엇인지, 좁혀갈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 논의의 과정은 투명하게 진행되어 억지가 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지성이 성숙되어지고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익혀가야 한다. 
시장의 논리를 현실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공공의 관점이 시장에 함몰되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가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좌파적 정파들은 (민주당이 여기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담론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지금은 좌파라는 정체성도 없고, 개별적인 문제에 산발적인 논쟁만 여기저기에서 벌어진다. 
담뱃값인상, 경제민주화법, 대기업규제, 중소기업지원, 이런 여러 문제들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다루어져야 하는 사안들이나, 어떤 정파에 존재 의미를 줄 정도로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문제들은 아니다. 
시장주의자의 논리와 근거들에는 설득력이 있으며, 미시적 차원에서의 정부의 관여는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큰 줄기를 잡는 것이 필요하다. 
증세와 복지의 확대, 교육에 있어서의 경쟁의 감소와 같은 문제들이다. 
국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해, 시장주의의 한계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무엇인지를 정립하고 주장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아마, 거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당의 경제정당화 움직임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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