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치인의 연설에서 별로 감동 받은 적이 없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엔 어떤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의 연설은 재미있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의 연설은 그냥 좋게 보이려는 말들의 성찬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개중에는 대통령의 국정연설처럼 앞으로 자신이 추진하려는 일들의 방향성 같은 것이 들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내용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하긴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의 연설이나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연설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으니, 명연설과 그렇지 않은 연설들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자격은 없다고 하겠다. 고상한 단어들과 이상들로 채워진 정치적 연설에 대한 취향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연설은 아테네 병사들을 추모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과 유명한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처칠의 연설 정도이다. 

한 번 다음 연설의 문구를 읽어 보자. 

헌법은“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합니다. 정치인은 주권자의 대리인입니다. 국민이 맡긴 권력은 오직 국민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서러운 국민의 눈물을 닦고, 절망하는 국민께 꿈과 희망을 드려야 합니다. 강자의 횡포를 억제하고 약자와 동행하며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작년 가을 이재명 대표가 국회에서 한 원대교섭단체 대표 연설의 첫 부분이다. 
따분하다. 정치인이 주권자의 대리인이라는 것, 국민이 맡긴 권력은 국민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말들에서 뭘 느껴야 할까?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말이란, 아무 의미 없는 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기자들에 대한 답변에서도 이재명 대표는 질문과 별 관계가 없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하나마나 한 원론적인 답변에 그칠 때가 많다. 
"검찰이 이번에 새로운 혐의점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번에 또 신작 소설을 쓰는 모양인데 흥행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비명 의원들의 통합비대위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민주주의 정당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재미 없고 아무 유익이 없고 지루하다. 

하지만 한동훈 전장관의 말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항상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다. 재미가 있고 포인트가 있으니까 언론에 계속 해당 발언 영상이 반복적으로 회자가 된다. 
300명의 여의도 문법이 아니라 5천만이 쓰는 일반인의 문법으로 이야기하겠다고 한 말이나, 단식으로 사법시스템이 정지되는 선례가 생기면 잡범들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와 같은 말들이 그렇다.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나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말에 주목하게 만들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한동훈에게는 있다. 

이번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이 언론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그런 '말하는 역량'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다른 정치인의 연설이 이렇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언론에서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연설 중에서 발췌된 두세 문장의 범위를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한 편의 연설 안에 언론과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많은 요소들을 담았다. 

이번 연설에서 개인적으로 주목이 되는 문구들 중에서 몇 가지만 뽑아 얘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은 첫날이니, 저를 이 자리에 불러내 주신 국민의힘 동료 여러분들께 제가 어떤 생각으로 비상대책위원장의 일을 할 지 말씀드리죠.

우선 도입부가 신선하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하나의 간결한 문장으로 연설의 취지를 밝히는데, 이것은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연설을 하는 이유부터 밝히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정치인들의 연설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들고 다닌 적도 있는 만큼, 그런 고대의 연설들의 스타일에 익숙한 바가 있을 것이다. 
다음의 대목들에서도 처칠을 인용하거나 서태지의 노래 가사를 인용한 부분들이 나오는데, 그런 모방과 활용을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좋은 모범들을 가져와 변형시켜 적용하는 일도 역량이고, 청중들에게 한 번 검증된 적이 있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효과가 있으며, 그런 인용이 또다른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당을 숙주삼아 수십년간 386이 486, 586, 686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메시지는 익숙하지만,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 있다. 한때 젊었던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후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 과거의 운동권 경력에 대한 보상으로 특권을 누린다는 것, 민중의 혁명의식을 일깨우는 선도적 엘리트의 역할을 자임했던 계몽적 의식과 행태를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것을 "386이 486, 586, 686이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과 같은 짧고 간결한 표현으로 전달해 낸다. 이런 인식의 타당함을 논외로 하고 표현력에 있어서는 발군이라 하겠다. 

한동훈(앞으로 편의상 직위는 생략하겠다)은 민주당의 핵심적인 약점들을 간결한 논리로 공격하고 처칠을 인용해 가면서 적에 맞서야 하는 절박한 명분을 강조한 다음, 몇 개의 문장만으로 방향을 틀어 주제를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으로 옮기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저는, 정교하고 박력있는 리더쉽이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만날 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표와 개딸전체주의, 운동권 특권세력의 폭주를 막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겨야 할 절박한 이유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이겨야 할, 우리 정치와 리더쉽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위대한 대한민국과 동료시민들은 그것보다 훨씬 나은 정치를 가질 자격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국민의힘이 추진할 정책들의 분야를 열거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한동훈의 경제적인 표현 능력이 드러난다.
 
인구재앙이라는 정해진 미래에 대비한 정교한 정책, .. 안보, 경제, 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을 가속화하는 정책, ..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는 원칙있는 대북정책, 기후변화에 대한 균형있는 대응정책, 청년의 삶을 청년의 입장에서 나아지게 하는 정책, ..

이 문단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분야들을 나열할 뿐만 아니라 각 정책마다 추진 전략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구 정책은 정교하게, 대북정책은 명문과 실리를 함께 살리면서, 기후변화 대응은 균형있게, 청년 정책은 청년의 관점에서라는 식이다. 나는 기후변화 대응은 '과감하고 절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균형있게'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전략의 알맹이들이 불과 몇 개의 단어로 표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과는 한참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들으나 마나 한 원론의 수준에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그가 언급한 '정교하고 박력있는 정책'(이 또한 소수의 단어로 원론을 넘어서고 있는 표현의 예이다)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연설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동료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우리 한번, 같이 가 봅시다.

앞부분은 서태지의 인용이고, 마지막 줄의 앞부분은 노신의 인용, 마지막 문장은 처칠의 연설 마무리를 연상시킨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인용 능력도 역량이다. 문제는 감정에 호소하는 이 문장들이 의도한 효과를 가졌겠는가 하는 것이다. 
연설의 맨 앞에서 밝혔듯이 이 연설의 청중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국민의힘 동료'들이다. 그들에게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연설에 대해 나는 매우 높게 평가한다. 
어떤 메시지를 평가할 때는 먼저 그 메시지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논란의 여지 없이 흠 없는 사람만이 발언과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설을 하는 사람이나 그가 속했던 조직, 새롭게 대표하게 된 정당의 잘잘못은 연설의 가치와 다르게 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언론 보도나 정치인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을 통해 정치를 보면, 정치가 게임과 다를 게 없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누가 이기는지가 전부인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임과 달리, 정치는 '누가 이기는지' 못지 않게, '왜 이겨야하는지'가 본질이기 때문에 그 둘은 전혀 다릅니다. 

국민의힘의 변화, 민주당의 변화, 제3세력의 등장 등으로 앞으로 총선이 어떤 국면으로 진행될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디가 이기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질문은 누가 왜 이겨야 하는가일 것이다. 
한동훈은 핵심을 잘 짚고 있다. 
말의 역량은 생각의 역량이기도 하며 정치의 역량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동훈은 점수를 따고 있다. 
앞으로 닥쳐오는 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통해 그가 어디까지 역량을 증명하는지가 앞으로의 정치인생과 국민의힘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반응형

김대식 씨의 '빅퀘스천'이란 책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고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었다. 검색을 해 보니 관련된 글(인생 시나리오 6가지라면, 당신의 최종 선택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는 여섯 가지 방식 중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리디아의 부유한 왕 크로이소스가 주인공이다. 크로이소스 왕이 자신을 방문한 그리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자 솔론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난 그리스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끝을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크로이소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뿐이지만 나중에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패해 사로잡히고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솔론의 말이 생각난 크로이소스는 그의 이름을 한탄스럽게 외친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키루스 왕이 크로이소스에게 연유를 묻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이 했던 말을 전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키루스 왕은 크로이소스를 풀어주고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마지막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든 끝이 좋으면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고 습관으로는 인생도 한 편의 영화처럼 끝이 좋아야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령화 시대의 현실에서 우리 삶의 가치가 그 마지막 모습으로 평가받는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전쟁과 기아와 여러 위험이 줄어든 현대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노인이 되고 병을 앓다가 죽는다. 죽는 자리에 위로가 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죽은 뒤에 좋은 기억을 간직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재산을 남겨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치매를 앓으며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될지 병실 침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면서 몇년을 지내게 될지 하룻밤 사이에 평안한 죽음을 맞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리스크이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쪽이다. 
절대적인 인생의 의미란 것은 없겠지만, 의미라는 것이 삶을 살면서 지향하는 방향을 정하는 데 활용되는 가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 마지막을 어떻게 맞느냐보다는 그 전까지 내가 할 경험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선균 씨의 죽음은 이르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분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75년생이시니 50년에 조금 못 미치는데,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이선균 씨의 삶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밀도 있게 채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주로 연기를 통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본 작품들은 나의 아저씨, 기생충, 하얀거탑, 골든타임, 검사내전의 일부, 우리선희, 화차, 내 아내의 모든 것, 임금님의 사건수첩 정도이다. 
연기로 보여 준 모습이 본인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그의 연기들에서 느껴졌던 인간성의 결들이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들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 결들이란 무엇이었을까?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 주었던 착함과 성실함과 반듯함과 믿음직스러움이 중심적인 이미지인 것 같다. 하얀거탑의 최도영 의사가 보여 준 강직함이나 화차에서 보여 준 따뜻함, 기생충의 박사장이 보여 준 유능함의 카리스마는 이 중심 이미지들과 겹친다. 한편으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검사내전에 보여준 찌질함과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볼 수 있었던 경쾌함, 우리선희에서 느껴졌던 풋풋함과 고지식함 등 좀 결이 다른 이미지들도 있다.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휴머니즘이다. 그를 떠올리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선량하지만 찌질하기도 한, 부드럽지만 강한, 인간다움이 느껴지고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던 연기자였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이나 이미지들이 실제의 본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연기라고 하는 것은 배우가 연기하려는 인물의 마음을 자신 속에서 재현해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연기되는 인물들은 그 배우가 가진 마음의 가능성의 공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고, 배우라는 존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연기했던 장면들을 기억하면서 그를 추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 가지 장면들을 뽑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 나의 아저씨, 오랜 만에 만난 지안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방백으로 편안함에 이르렀는지 묻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건너 걸어가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망치를 들고 벽을 두드리며 형과 동생을 모욕한 건축업자를 협박하는 장면
  • - 우리선희, 선배와 술을 마시며 '형 내말들어 내말들어 형 내말들어.. 끝까지 파고 끝까지 파야 아는거고 끝까지 파야.."​ 대사를 하는 장면
  • - 검사내전, 카페에서 멤버쉽 쿠폰으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시켜 마시는 에필로그
  • - 골든타임, 사고 치고 자책하고 야단 맞고 성장하는 인턴 의사의 모습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이 있지만 내가 장면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구체적인 장면이랑 매칭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경찰 조사를 받기 전후에 기자들 앞에서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하거나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고 이야기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던 모습에서는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로선 남아 있는 길 중 최선이라고 생각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영화와 광고 등의 위약금으로 100억원 정도를 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기사도 보았는데, 연예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책임을 요구 받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반응형
초한쟁패에 대한 역사책을 읽다 보니 유방과 항우가 대결하는 자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열 가지 죄를 들어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쓰여지기 때문에 승자의 미덕은 부풀려지고 패자의 잘못은 부풀려진다. 
하지만, 천하의 패권이 정해지기 전에 유방이 항우를 비판하면서 지적한 열 가지 잘못은 팩트에 기반하고 있고 당시 여론으로도 항우 쪽의 잘못이자 약점으로 인정받을 소지가 많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대표적으로 항우는 진나라의 항병 20만명을 학살한 업보가 있다. 패왕별희의 낭만이 그의 업보를 다 가릴 수는 없다. 
그에 영감을 받아 이재명 대표의 잘못을 명백하게 지적해 보고 싶었다. 정치란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무슨 현실을 앞세우든 간에 그 근본은 명분의 싸움이다. 
열 가지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다섯 가지나 일곱 가지일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자주 활용되어 온 기법인데, 내가 지지하는 명분을 밝히고 상대측의 명분 없음을 지적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재명 대표의 대표라는 직함은 생략하려고 한다. 그래야 좀 격문 같은 맛이 나는 것 같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였으나, 두 달 만에 연고도 없는 유리한 지역구를 찾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면서 그것이 책임을 지는 일이라 말하여 책임이라는 말의 가치를 떨어뜨렸으니 그것이 첫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본인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음에도 당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 민주당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를 보상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두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하였고 또한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이를 번복하고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하여 자신이 한 말을 뒤집고 당이 명분을 잃는 위험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세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에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들을 모욕하고 배척하는 강성 지지자 및 정청래 등 소위 친명 정치인들의 행태를 제지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고 당의 문화가 반민주주의적이 되도록 방치하였으니 이것이 네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명을 하지 않았고 대선 과정에서도 이런 단순한 의혹들에 대처를 하지 못해 패배를 자초하였으니 이것이 다섯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음주운전, 욕설, 검사사칭 등 여러 범죄 및 비도덕적인 행위 전력이 있어 민주당이 상대 측의 잘못을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였으니 이것이 여섯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형식적인 답변을 반복하거나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동문서답하는 등 유권자를 대변하는 언론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펼칠 역량이 없음을 보였으니 이것이 일곱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대한 검찰의 수사가 의도적인 보복 수사라고 하는 비객관적인 전제의 주장을 야당의 당대표 지위를 보유한 채 반복하였고 민주당이 그런 전제 하에 당의 입장을 세우도록 유도 내지는 방조함으로써 개인의 유무죄 판결 여부에 공당의 정치적 운명이 결부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여덟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당의 혁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혁신위원장에 극단적 발언을 일삼은 함량 미달의 인사를 임명하였다가 문제가 되자 9시간 만에 번복함으로써 사람을 보는 식견이 없음을 드러냈으니 이것이 아홉번째 죄이다. 

이재명은 선거제도에 대한 자신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정치인 및 정치학자들이 퇴행이라고 평가하는 병립형 비례선거제로의 회귀를 시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멋있게 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발언을 통해 승리가 명분보다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유권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보인 열번째 죄이다. 
 
이상의 죄를 열거하면서 대장동이나 위증교사 의혹 등 재판 중에 있는 사안은 넣지 않았고, 오염수 방류 반대를 명분으로 내건 단식 등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항목들도 넣지 않았다. 아마 넣을 만한데 넣지 못한 항목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원칙과 상식' 토크쇼에 모여 민주당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너'라고 외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재명 대표의 잘못들의 중대함에 동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 이재명 대표의 퇴진은 민주당의 혁신을 위한 최소 조건이다. 하지만 퇴진 가능성도 적을 뿐더러 퇴진을 한다고 하더라도 친명계의 헤게모니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명분을 잃은 당 대표와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정당을 상대 정파가 더 나쁘다는 이유로, 또는 그 소위 내 이념적 성향에 그나마 가까운 정당이라는 이유로 지지해야 하는 것일까? 
명분과 신뢰를 잃은 정당이 이념인들 제대로 대변할 수 있겠으며, 이념과 합리성이 함께 해야 할 문제들에 좋은 정책과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제3지대는 필요하다. 더 나쁜 세력을 막기 위해 다른 세력을 지지해야 하는 인질과 같은 상황은 벗어나야 한다. 
대통령 한 사람 이상하다고 망하는 나라라면, 어차피 망할 나라이다.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는 아니라고 믿는다. 
싫은 자들을 징계하는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정치를 시작해야 하는 때이다. 
(2023.12.22일 최초 작성)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