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불평등>은 2022년 출간된 책으로, 문재인 전대통령이 추천하는 등 화제에 많이 올랐던 책이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은 우선 그 역설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끈다. 우리는 보통 불평등이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은 불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랜 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민주당 소속의 정책전문가인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난다면, 이 독후감을 읽기 전에 책을 먼저 직접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설책을 읽듯,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데이터와 논리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답변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독후감은 일종의 스포일러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좋은 불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늘어남으로서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불평등이다. 저자는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 좋은 평등과 나쁜 평등의 네 가지 차원을 구분하는데, 나쁜 불평등은 저소득계층의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우, 좋은 평등은 그 반대의 경우, 나쁜 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불평등이 완화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역사를 주요한 변곡점으로 경계가 지어지는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하는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지는 불평등의 지속적 심화는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급성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1992년의 한중수교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주요 이벤트로 삼는 중국 경제와 무역의 급격한 성장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중국수출 역시 급증하면서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통해 대기업 임직원들의 보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 불평등 확대의 주 요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의 신발산업과 대구의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저기술 산업은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사양화되고 관련 종사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줄어들면서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2007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기업의 성과를 줄이면서 불평등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와 미중 갈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불평등의 확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전자가 좋은 불평등의 사례라면 후자는 나쁜 평등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저자는 여러 가지 데이터로 뒷받침하는데, 나한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88년에서 2008년 기간 동안 글로벌 소득 분위별 실질소득 상승률을 표현한 그래프였다. 오른쪽 방향으로 서 있는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코끼리 곡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전세계적으로 코끼리 등에 해당하는 하위 10~60% 계층은 소득상승 비율이 높은 반면, 코끼리의 굽어진 코 아랫면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20% 부근 계층은 실질소득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전자는 주로 중국으로 대표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의 국민들이고, 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중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권자들이 이민을 거부하고 자국의 기존 엘리트계층을 불신하면서 이에 편승하는 극우 정파를 지지하는 현상을 일부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해법이 잘못된 진단과 협소한 관점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진보 진영이 진단하는 불평등 문제의 원인은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의 3대 적폐이며, 그러한 진단에 따라 이 적폐들을 해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단과 해법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 때 추진된 최저임금인상의 효과를 자세히 분석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고용을 감소시키면서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선의의 정책으로 인해 나쁜 불평등이 초래된 셈이다.

저자는 더 넓은 맥락에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정책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저해하고 경제 전반의 저부가가치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고부가가치 영역을 제한하고 저부가가치 영역을 지원하는 정책은 경제 전체의 부가가치를 낮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의당이 주장했던 대기업 임원들의 최고임금제한 정책 같은 시도는 국내 인재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중국의 기업들을 유리하게 하고 반도체 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가 불평등에 문제의식을 갖는 진보진영 인사로서 제안하는 해법의 방향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과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며, 평등을 지향하되 경쟁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 정책으로 고등교육의 질을 해치는 것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이 되도록 하면서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는 저소득층에 대한 장학금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복지 측면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의 계층이 노인빈곤층임을 강조하면서 기초연금 상향, 노인일자리 확대, 노후 돌봄 서비스 강화 등 사회의 약자를 돕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로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먼저 진보 진영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이 된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노동 탄압이 오히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누르면서 불평등 감소 요인이 되었고,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임금 격차가 확대되고 불평등 지수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진보 진영의 일반적 인식에 도전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특히 불평등 문제를 가진 자들의 탐욕이나 불공정한 권력 배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같은 구조적이고 거시적 요인에 비롯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에 공감이 간다.

다만, 해법은 지나치게 원론에 머무르고 있고 대안의 범위도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불평등 문제 뿐 아니라 성장과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나, 불평등과 성장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안이나 상충되는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부족했다고 본다. 물론, 책 한 권에서 연구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안에는 한계가 있으니, 진보 진영에 화두를 던지는 역할 이상의 기준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긴 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이 노인빈곤층이기 때문에 노인빈곤문제 해결이 불평등 완화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 과제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동의하지만, 노인이 아닌 사람들을 포함한 불평등 문제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불평등 해소에는 결국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고, 증세에는 국민 저항과 더불어 증세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반대 주장들이 따른다. 그렇다면, 증세와 재정 규모의 확대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진보 진영의 정책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저자가 경쟁력 강화와 계층 간 사다리 구축을 위해 제시하는 방안은 교육 개혁에 많은 비중이 있다. 교육 개혁은 보수나 진보 이념에 관계 없이 폭넓은 동의를 받을 만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교육개혁의 조금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교육정책 만으로 성장과 불평등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이냐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나 임금 양극화 현상이 교육 개혁만으로 해소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수석편집자였던 라이언 아벤트는 <노동의 미래>에서 교육의 향상이 첨단기술 분야의 병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은 될 것이나 노동자 간의 경쟁을 높여 불평등 해소에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진보 진영이 불평등 심화 원인의 핵심으로 짚어 왔다고 하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리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재벌 문제와 관련한 저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이는데,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지만 대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국가가 지원할 대상이고,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등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해서도 지나친 보호적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이해가 된다. 원론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으나, 고부가가치에 대한 지원과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보호 축소의 직접적인 효과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쁜 평등보다는 좋은 불평등이 낫다는 원론적 입장에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불평등 간의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기준들이 현실의 정책들을 다루는 데 적용될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보수 진영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맞서는 진보 진영의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과 고용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정책을 병행한다거나, 기업의 부작용이 심한 규제를 풀어주는 것과 반대급부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규제 정책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입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런 주장들은 보수측 입장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보수 진영과 공통적인 기반을 넓혀 나가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으나, 노동조합 등 진보진영 지지층의 동력을 모아 정치적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수 진영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 주는 이념적 전제들 역시 필요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논리를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있는 논리들이 더 탄탄하게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

성장과 평등에 함께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상충되는 측면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우선주의에 저항하는 평등 지향 정책을 펴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 진영은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을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 머물러야 할까? 또는 보수 진영에서 평등 지향 정책들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평등 지향 정책의 범위를 넓히고 제약들을 넘어서야 할까? 후자를 위해서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지탄받는 정책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이거나, 오히려 성장에도 도움이 되거나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이거나, 아니면 비록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 정도의 손실은 더 큰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 감수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모두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진보 진영은 성장과 국가 경쟁력, 불평등 완화의 가치에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가치들 간의 상충 관계를 최소화하는 정책들을 지향하거나, 상충 관계를 갖는 가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에 근거한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책들은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엽적인 이슈들에 분산되지 않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포괄적인 체계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은 객관적인 사실과 설득력 있는 이론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불평등’은 풍부한 데이터와 간명한 논리들로 하나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정치에서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겠지만,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역량이 없다면 정권을 차지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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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씨의 '빅퀘스천'이란 책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고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었다. 검색을 해 보니 관련된 글(인생 시나리오 6가지라면, 당신의 최종 선택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는 여섯 가지 방식 중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리디아의 부유한 왕 크로이소스가 주인공이다. 크로이소스 왕이 자신을 방문한 그리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자 솔론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난 그리스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끝을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크로이소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뿐이지만 나중에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패해 사로잡히고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솔론의 말이 생각난 크로이소스는 그의 이름을 한탄스럽게 외친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키루스 왕이 크로이소스에게 연유를 묻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이 했던 말을 전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키루스 왕은 크로이소스를 풀어주고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인생의 가치는 그 마지막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든 끝이 좋으면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고 습관으로는 인생도 한 편의 영화처럼 끝이 좋아야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령화 시대의 현실에서 우리 삶의 가치가 그 마지막 모습으로 평가받는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전쟁과 기아와 여러 위험이 줄어든 현대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노인이 되고 병을 앓다가 죽는다. 죽는 자리에 위로가 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죽은 뒤에 좋은 기억을 간직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재산을 남겨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치매를 앓으며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될지 병실 침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면서 몇년을 지내게 될지 하룻밤 사이에 평안한 죽음을 맞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리스크이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쪽이다. 
절대적인 인생의 의미란 것은 없겠지만, 의미라는 것이 삶을 살면서 지향하는 방향을 정하는 데 활용되는 가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 마지막을 어떻게 맞느냐보다는 그 전까지 내가 할 경험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선균 씨의 죽음은 이르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분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75년생이시니 50년에 조금 못 미치는데,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이선균 씨의 삶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밀도 있게 채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주로 연기를 통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본 작품들은 나의 아저씨, 기생충, 하얀거탑, 골든타임, 검사내전의 일부, 우리선희, 화차, 내 아내의 모든 것, 임금님의 사건수첩 정도이다. 
연기로 보여 준 모습이 본인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그의 연기들에서 느껴졌던 인간성의 결들이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들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 결들이란 무엇이었을까?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 주었던 착함과 성실함과 반듯함과 믿음직스러움이 중심적인 이미지인 것 같다. 하얀거탑의 최도영 의사가 보여 준 강직함이나 화차에서 보여 준 따뜻함, 기생충의 박사장이 보여 준 유능함의 카리스마는 이 중심 이미지들과 겹친다. 한편으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검사내전에 보여준 찌질함과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볼 수 있었던 경쾌함, 우리선희에서 느껴졌던 풋풋함과 고지식함 등 좀 결이 다른 이미지들도 있다.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휴머니즘이다. 그를 떠올리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선량하지만 찌질하기도 한, 부드럽지만 강한, 인간다움이 느껴지고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던 연기자였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이나 이미지들이 실제의 본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연기라고 하는 것은 배우가 연기하려는 인물의 마음을 자신 속에서 재현해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연기되는 인물들은 그 배우가 가진 마음의 가능성의 공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고, 배우라는 존재는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선균 씨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연기했던 장면들을 기억하면서 그를 추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 가지 장면들을 뽑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 나의 아저씨, 오랜 만에 만난 지안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방백으로 편안함에 이르렀는지 묻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건너 걸어가는 장면
  • - 나의 아저씨, 망치를 들고 벽을 두드리며 형과 동생을 모욕한 건축업자를 협박하는 장면
  • - 우리선희, 선배와 술을 마시며 '형 내말들어 내말들어 형 내말들어.. 끝까지 파고 끝까지 파야 아는거고 끝까지 파야.."​ 대사를 하는 장면
  • - 검사내전, 카페에서 멤버쉽 쿠폰으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시켜 마시는 에필로그
  • - 골든타임, 사고 치고 자책하고 야단 맞고 성장하는 인턴 의사의 모습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이 있지만 내가 장면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구체적인 장면이랑 매칭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경찰 조사를 받기 전후에 기자들 앞에서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하거나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고 이야기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던 모습에서는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로선 남아 있는 길 중 최선이라고 생각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영화와 광고 등의 위약금으로 100억원 정도를 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기사도 보았는데, 연예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책임을 요구 받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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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은 제가 소개하려는 책의 제목입니다. 리 매킨타이어란 분이 2021년 출간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드문 것 같은데 미국이나 브라질 같은 나라에는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입니다. 미국에선 2% 정도가 그렇게 믿고, 5% 정도의 현명한 사람들은 지구 모양에 대해 어느 이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평평한 지구론에 대한 유튜브 영상도 많고, 꽤 큰 규모의 행사도 열린다고 하네요.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행사에 참여해서 강연도 듣고 참석자들과 대화도 나눕니다. 저자는 그런 시도들을 통해 뭔가 교훈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을 과학부정론의 하나로 봅니다. 과학부정론이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탐색하면서 기후위기와 GMO를 구체적인 사례로 상세히 다룹니다. 저자는 기후위기에 대한 부정, 백신에 대한 배척, 진화론에 대한 거부, GMO 식품에 대한 회피 등을 평평한 지구론과 더불어 과학부정론의 대표적 사례들로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 신봉자들의 행사에 참여해서 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보려고 했던 것은, 과학적인 합의를 믿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방법에 대한 탐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로선 저자의 목적의식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표현했지만 저는 공론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공론이 꼭 과학부정론자와의 대화일 필요는 없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일은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을 믿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과학자들의 폭넓은 합의가 없는 분야에서 토론을 하는 경우엔, 서로가 상대방을 과학부정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과학부정론자와의 대화 뿐 아니라 더 넓은 주제들에 대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관해서도 시사점을 가질 것 같습니다. 
제가 책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출처 : https://www.ksakosmos.com/post/지구평면설-그들은-왜-지구가-평평하다고-믿는가
그러면 저자가 배운 점들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공통된 성향을 발견합니다.

  1.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들만 보려고 하는 체리피킹
  2. 자신들의 믿음을 부정하는 근거와 논리들이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음모론
  3. 그럴 듯한 권위와 말을 내세우는 가짜 전문가들에 대한 의존
  4. 비논리적인 논증
  5. 상대방에게 스스로 과학적임을 밝히기 위해 100% 진실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성향들을 시금석처럼 적용해서 상대방이 비이성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담배의 유해성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담배회사들의 로비 탓이  크다는 것과 기후위기부정론 역시 석유기업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거가 있는 음모론과 근거가 없는 음모론을 구분하지 않고 음모론이 비이성적인 주장의 징후라고 얘기하긴 어려운 셈입니다. 

하지만 저한테 가장 시사점이 있게 느껴진 것은 5번째 항목입니다. 즉, 과학부정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공격을 당할 때 그러는 너희는 100%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근거를 갖추고 있느냐고 역공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강력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과학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흔히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완벽히 증명하긴 어렵지만, 그것은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옳고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두 이론이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러면서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이야기되는 많은 근거들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찾아 공격한 다음, 이것 봐라, 진화론이 완벽한 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원인이 인류의 활동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변화인지, 그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등에 대해 확정하기 어렵다고 주장을 펼치면 더 그럴 듯하게 들리고 반박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사실, 어디까지가 과학부정론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인지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 중에 GMO, 즉 유전자변형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부분이 있다는 걸 보면, 기후위기나 평평한 지구론 같은 주제를 다룰 때와 다른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 주제는 저자가 과학부정론이 우파적 현상인지 고찰해 보고자 선정한 주제입니다. 기후위기에 대한 부정 등 과학부정론의 여러 주제들이 공화당 지지 성향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과연 진보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과학부정론은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다루어 본 것이죠. GMO의 경우 저자의 입장은 그 위험성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과학계의 합의라는 것이고, 반면 불충분한 근거로 GMO를 회피함으로 인해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작물을 기르지 못하게 되어 기아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등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갖고 저자는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오랜 과학자 친구와 대화를 나눕니다. 제가 보기엔 그 결과가 좀 애매한데, 친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더라도 유전자조작으로 진화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미리 파악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고 그런 위험성을 감추려는 몬산토 같은 거대 기업들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원래의 입장을 바꾸지는 않지만, 평평한 지구론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만큼 상대방이 틀렸다는 확신을 갖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이고, 이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작이라고 평가합니다. 
 
저자는 과학부정론자들이 그런 믿음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근거의 제시를 통해 유연하게 믿음을 바꿀 여지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믿음이 정체성의 일부가 되면 정보와 근거를 제시하고 논증하는 것만으로 믿음을 바꾸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으면서 상대방이 제시하는 논증과 근거를 피해가는 방법은 풍부하고,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는 데 능숙한 우리의 정신은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는 근거들을 가볍게 외면하거나 뿌리칩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우선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외면할 때, 잘못된 믿음은 더 힘을 얻고 퍼져나갑니다.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라도, 우리는 잘못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박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박모 님께서 공론과 관련해 썼던 제 글에 답글로 달아주셨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또한 충분히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믿음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방식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논쟁을 하고 공격하기보다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신뢰를 구축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자의 글에 제 생각을 섞은 표현이지만, 서로 다른 믿음을 갖고 대결한다는 프레임에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함께 찾아간다는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대화는 쉬운 일이 아니고 좌절감을 안겨줄 때가 많지만, 이렇게 성실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또한, 하나의 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문장으로 표현된 주장보다 같은 이야기를 도표나 그래프로 표현한 근거로 제시할 때 더 쉽게 믿음을 바꾼다고 합니다. 아마 텍스트보다 숫자들을 볼 때 정체성이 위협 받는다는 느낌을 덜 받는 것 같습니다. 좀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논리를 통한 설득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지만 숫자 등 객관적인 데이터와 정보는 좀더 쉽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듯 합니다. 잘못된 논리를 믿었다는 건 자기가 바보였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 새로운 정보를 보고 판단을 바꾸는 일은 쿨한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표나 그래프를 잘 쓰지 않고 장문을 써대는 저로선 불리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은 100%의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상대방에게도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판단이란 현재로서 가능한 최선의 가설입니다. 
코로나를 대처하는 방법을 가이드하면서 과학자들은 실수를 저지르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코로나 초기에 마스크를 쓰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자신이 가진 본래의 믿음이나 가치관보다 새로 발견되는 객관적인 근거에 맞추어 자신의 믿음과 판단을 업데이트하고자 노력합니다. 백신이 안전성을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백신의 위험보다 백신 접종을 통한 전염병 방지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현재까지 알 수 있는 것들을 토대로 내린 최선의 결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설보다 더 의존하기에 나은 가설이라는 입장에서 대화를 나눈다면 더 생산적인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에서 하나만 건진다면, 저는 "입장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대화를 포기해선 안된다."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만 더 추가를 한다면, 좀 뜬금 없으시겠지만, "트럼프는 정말 위험한 대통령이었다."일 것 같습니다. 

 

(최초 작성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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