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는 mp3가 없었다. 라디오나 TV방송이 아니라면,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들었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삘'이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그 곡이 담긴 음반을 사서 들었다.
좋아하는 음악들을 모아 녹음한 테이프를 갖는 일은 로망 중의 하나라서, 선곡과 배열을 위한 고심과 번거로운 수작업 끝에 만들어낸 나만의 명곡 테이프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엔 모르는 노래는 어떤 곡인지 앱이 자동으로 찾아 주고, 곡 단위로 다운로드를 받거나 스트리밍을 통해 어디서든 편하게 들을 수 있다. 그때그때 기분과 상황에 맞추어 듣고 싶은 곡들로 재생목록을 만드는 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녹음된 순서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카세트테이프 방식에도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진보의 덕분으로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 있어 더 많은 자유와 유연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음악을 듣는 방식에 있어서 일어난 것만큼의 변화가 책을 읽고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일어나지 않을까?
웹이 등장하면서 이전에는 책의 형태로 존재했을 콘텐츠들의 상당한 부분이 웹 페이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니 이미 엄청난 변화가 있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은 여전히 웹이 담지 못하는 많은 고급지식들을 담고 있다.
책을 읽는 방식의 변화는 종이책으로 읽던 책을 전자북으로 읽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책의 내용들이 온라인 상에 존재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음반 단위로 구매하던 음악을 곡 단위로 구매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듯이, 책의 내용도 부분 단위로 구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서문과 목차별 요약문을 따로 구매할 수 있고, 목차별 요약문 중에서 본문의 내용까지 보고 싶다면 추가 구매를 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책에 포함된 주석들은 하이퍼링크를 통해 다른 책의 특정 부분과 바로 연결될 것이고, 학교 레포트나 기업의 보고서, 개인의 블로그에서도 인용하는 내용들로 바로 연결해 주는 링크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장 많이 팔린 책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나 문구에 대한 정보도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가서,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인용하는 다른 책의 내용 뿐 아니라, 그 책을 인용하고 있는 콘텐츠들도 함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책에 내용에 반박한 다른 책의 내용을 재반박하는 내용을 담아 원래의 책에 주석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관점 뿐만 아니라 그를 보충해 주는 내용이나 반대하는 관점들까지 함께 볼 수가 있게 되고, 자신이 직접 저자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의 경우를 보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용한 변화는 산업의 현실을 극복하고 언젠가는 일어나게 마련인 것 같다.
모든 책이 온라인에 존재하는 세상이 된다면,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학습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식근로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변화가
가능해지리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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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다.

어떤 사명이나,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 행복이나 사랑과 같은 가치들,

이런 것들에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데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추상적인 가치에 의지하는 것보다 삶 자체에서 답을 찾는 것이 좋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행복과 사랑, 계획, 성취, 자아실현 같은 것들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완벽하게 균형 잡힌 논리 체계가 아니라 느슨하게 모여진 교훈들,

상황에 따라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고,

결국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균형을 찾아가야 하는 지침들을 갖게 된다.

그런 본성과 교훈들에 의지해 가면서, 그렇지만 어떤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삶의 의미와 우선순위가 혼란되게 느껴질 때는, 사는 건 그냥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좋다.

살면서 배우고, 변화하고, 잊고, 다시 배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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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내세가 있다면 그것은 덤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관으로는 내세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있다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신이 존재하느냐고? 그건 신을 정의하기 나름 아닐까?

그는 세상 전체, 또는 세상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가 신이라고 생각했고,
그 존재가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신이겠는가?

뭐 이런 식으로. 편의적으로 적당히 생각하면서 그냥 산 것이다.

당연히 신으로서는 이런 태도가 매우 불만이었다.

신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 그의 일생동안 맘껏 재앙을 내렸다.

그리고 이승의 생을 마치고 심판(이랄 수도 있겠고 리뷰라고 할 수도 있는 자리)에 끌려나온 그에게 자신이 내린 재앙들을 주욱 열거하고는 물었다.

"불만있냐?"

그는 신이 좀 속이 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제시한 섭리에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신은 나름대로 완전한 존재이고 그가 마련한 섭리 또한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고 섭리이겠는가?

그래서 불만 없다고 대답하자, 신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까지 수천억의 영혼을 상대하면서 신이 어떤 불만을 제시하는 영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과 다르게 신은 수천억 번째의 대답에도 만족을 느꼈다.

신이란, 인간으로선 불가해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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