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학자들은 상당수 자유무역을 선호한다.
비교우위 이론, 자유무역이 보호무역에 비해 전체적인 효용을 늘린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증명하는 논리는 단순하고 타당해 보인다.
더 단순하게 말해서,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다면 국가 간에 교역이 자유롭게 일어날수록 양쪽 국가 모두 득을 보지 않겠는가?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장 무역자유화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에 눈감은 학자들의 논리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무역자유화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도 생기지만 그밖의 사람들이 얻는 이득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크지만, 새롭게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만큼 크지 않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3세계의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어 쓰레기를 뒤지다가 새로 지어진 티셔츠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라고 할 것이다.
한편에는 수입품과의 경쟁에 밀려 도산하는 기업들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수출의 기회가 생기고 일자리가 생긴다.
이 모든 이익과 손해를 합하면 두 국가 모두에게 남는 장사다.

2.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반론이 있다.
하나는,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 방식의 논리.
자유무역 상태에서 후진국은 선진국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없으며 보호받는 시장에서 체력을 키운 후에 자유무역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래프와 명제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경제학의 연역적 논리와는 다른 방식의 주장이며, 
그 논리의 개연성은 데이터와 사례들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함의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장하준 교수의 논리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데 쓰일 수도 있고,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이 되었으니 우리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나라들과는 FTA를 맺어야할까? 국익에는 도움이 되나 도덕적으로는 맞지 않는 일일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나라의 산업은 보호되어야 하고 선진국들과 과감하게 FTA를 체결하기는 시기상조일까?

3.
내게 더 설득력이 있는 반론은, 자유무역은 국가 전체의 부를 늘리는 반면 국가 내 소득 배분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외국의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글로벌 역량을 갖춘 사람들, 영어도 잘하고 해외 경험도 있고 세계 경제에 대한 감도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경제의 글로벌화가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한류스타들을 보라. 그들은 이제 일본, 동남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멀게 느껴졌던 유럽, 미국, 아프리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반면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보호받던 내수시장에 밀고 들어오는 수입품과 경쟁하기 힘든 사람들은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 결과 이미 높은 소득을 올릴 잠재력이 있었던 사람들의 부는 더 늘어나고, 열심히 일해도 힘들다고 느끼던 사람들은 더 타격을 입는다.
삼성이 전 세계의 시장을 놓고 애플과 한 판 멋지게 붙는 동안,
특별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많은 근로자들은 후진국의 저임금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농업대국들의 기계화된 대형 농장주들과 경쟁해야 한다.
아마 개인 입장에선 변화에 적응하라는 것이 최선의 지침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진취적이고 재능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눈부신 재능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FTA는 국가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안에 제약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가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내릴 수 있는 여러 선택을, 국가 간의 경쟁력이라는 기준에 의해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구성원들의 복지와 소득 평준화 등 여러 목적으로 법인세를 거두지만,
세계화는 자본에게 더 높은 이동의 자유를 주고, 국가들에게 자본에 불리한 세금을 낮추도록 압박을 가한다.
세계화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부를 거두어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재배분할 수 있다면 세계화의 단점이 줄어들 수 있겠지만,
세계화는 한편으로 그와 같은 국가의 역할을 방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4.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결론을 내릴 입장에 있지 않다.
자유무역에는 국가 전체의 부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과 소득 격차를 늘리고 변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단점이 있다.
어느 쪽이 더 큰지, 적절한 균형점이 있는지, 어느 한 쪽의 장점이 장기적으로 다른 쪽의 단점을 상쇄하는 효과를 가져올지,
그런 것을 알려면 더 공부를 해야할 것이다.
당장 FTA를 체결하고 대상국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면 변화의 속도를 더 늦춰야 하는지 그런 것은 판단할 수 없다.
참여정권이 FTA 같은 문제에서 진보진영과 입장을 달리한 것, 일부 정치인들의 FTA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등도 이와 같이 문제의 애매한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다만, 방향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세계화가 국가의 역할을 방해하는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
좀 이상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국제적 합의를 향한 움직임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득 불균형 문제에 대한 국가의 대처가 강화되어야 한다.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갈수록 집중화되는 대기업의 경제력에 대항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실업급여나 재취업을 위한 교육의 제공 같은 방안들은 도움이 될 것이고, 경쟁력도 높이면서 각 구성원들이 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 지원하는 방안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안들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쓰여져야 하고 설령 단기적으로 국가경쟁력 관점에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증세도 필요할 것이다.
대기업, 금융전문가 등 힘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편향되지 않는 공적 의사결정 방안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 생각이다. 더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더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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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 협상 전까지만 해도 야권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두 후보 중 아무나 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지 않았을까?

단일화를 하면서 분열이 일어났다.

그럼 누구 책임일까?

결정적인 시점은 안후보 측이 민주당을 비난하며 단일화 협상을 연기했던 때가 아닐까?

그렇다면 안후보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끝내 협상이 실패한 것은 양쪽 다 물러나지 않은 것이니 시비시비를 가리긴 어렵다.

나는 가상대결로 후보를 뽑자는 것이 문제가 많았고 지지율로 정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었다고 보지만, 입장이 다를 수 있으니까.

아무튼 안 측에서 주장하던 단일화 룰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협상에서는 양보하지 않으면서 협상이 깨졌다고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문후보는 단일화에서 졌다 해도 안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다녔을 거다.

안후보는 단일화 판은 다 깨놓고 남의 일에 훈수 두는 양 하면서 이젠 또 새정치 얘기를 한다.

새정치를 얘기하지만 정확하게 새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다.

네거티브 안하는 게 새정치인가?

나중에 대통령 되서 옳다고 생각되는 법안을 상대 당에서 반대하면 설득하다 합의 안되면 물러나고 말 건가?

국회의원 수 줄이지 않으면 새정치가 안되나?

그러니까 안후보가 주장하던 새정치는 새정치라는 단어에 걸맞는 콘텐츠가 없는 공허한 것이었다.

안후보는 공허한 명분을 국민의 뜻과 본인의 정직한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말은 이해가 안된다.

한때 내가 이해 못하는 깊이있는 생각이 있겠지 했었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게 점점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권교체에 실패하면?

안후보는 정치에 발을 못 붙이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심정이다.

그의 선문답은 야권 분열을 일으킬 뿐 아무 도움이 안된다.

정권교체에 성공하면 민주당과 연합하는 세력으로서 차기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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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는 B이다, A는 B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가 있을까?
논리학 관점으로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장을 생각해 보자. "사과는 빨갛다."
이 문장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 있을까?

 

2.
그럴 수 있다. 왜냐 하면 어떤 사과는 빨갛고 어떤 사과는 빨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잘익은 홍옥처럼 새빨간 사과만 빨갛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국광처럼 붉은 색에 연두색이 한참 섞여 있어도 빨갛다고 할 것이다.
논리학 관점에선 사과가 어떤 사과인지, 그리고 빨갛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물론 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말하는 모든 문장을 그렇게 명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한 문장만이라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이 자명하게 여기는 개념들조차 철학가나 전문가들은 토론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3.

특히 시비를 걸려고 마음 먹은 사람에게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제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소크라테스는 다가와 물을 것이다. 네가 말하는 것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냐고.
그러면서 결국 내가 말하려는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뭔가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려는 건 뭔데 하면 소크라테스는 나는 단지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을 알 뿐 나머지는 잘 모르오 할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짜증내 하다가 사형에 처한 건 어쩌면 인지상정이다.

 

4.
완벽한 논리란 드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더 논리적인 것과 말이 안되는 이야기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앎은 논리와 사실 뿐 아니라 믿음, 직관, 비약, 감정으로도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의 지식은 한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

 

5.
하지만 완벽한 논리를 구사하는 방법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사과는 빨갈 수도 있고 빨갛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
양비론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지만, 양비론은 허망할 때가 많다.
수학에도 물리학에도 불확실성의 법칙이 있듯이 논리학에도 불확실성의 법칙이 있어서 의미와 확실성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에게 중요한 명제일수록, 그 명제는 확실하지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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