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디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난 어렸을 때 성선설과 성악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본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일텐데, 굳이 본성이 선하고 악함을 논하여 무엇하려는 것일까? 
이제는 맹자와 순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성선설과 성악설은 어느 한 쪽이 근본적으로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찌 치하에서 평범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광기에 열광적으로 또는 묵묵하게 동참했다. 
하지만 악이 편만했던 시대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다.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의 그리스, 스탈린 시대의 소련,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남김 없이 한 민족을 절멸시키던 고대의 유태인들을 생각해 보라. 
무고한 인질의 목을 베는 IS의 야만은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는 그와 같이 노골적인 모습의 악으로 점철된 사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변을 둘러보라. 
선거로 선출되는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유권자들의 보편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임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언론은 공익과 윤리의 관점으로 사안들을 비판하고, 교수들은 학문적 양심으로 지식에 기반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공직자는 공익을 위해, 경제인들은 자신의 부와 사회의 부를 위해, 저마다 담당하는 곳에서 맡은 직분의 사회적 가치를 염두에 두면서 최선을 다한다. 
우리 주변에는 선량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비웃는 어조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여러 장면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 사회는 정말 드물게 절대적 빈곤과 전쟁에서 벗어난 시대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정말 훌륭한 제도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이 언론과 표현의 보장된 자유 속에서 대중의 평판을 얻고자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치열한 이익 추구가 사회적인 공익에 대충으로라도 합치가 되도록 유도한다. 
이런 구조 하에서 사람들은 한쪽의 삶이 다른쪽의 죽음이 되는 노골적인 힘에 의한 대결을 벌이기보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규칙의 틀 안에서 대중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경쟁하고 추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가 보여 주는 부드러운 낯빛들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과 나찌 수용소에서 경비를 서는 평범한 독일 군인의 모습은 아주 다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선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위하여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감해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악을 악 자체로서 추구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이코는 소수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 양심을 어기는 사람은 사이코보다는 많겠지만 아주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불편하지 않게 치워 두거나 자신의 가치에 맞게 조정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정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이야기해 준다면, 
그에 대한 반론과 공정하게 비교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믿는다. 
당신이 일제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대동아공영권(동아시아 민족들이 함께 번영을 누리자는)의 논리가 귀에 달게 들릴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의 대학생이라면, 조국을 근대화시킨다는 시대의 사명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양심이 편해질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이것이 아마 사람이 선하기도 하면서 악하기도 한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